본문 바로가기
읽으며/시. 소설. 수필.

영원한 귓속말(문학동네시인선 자선 시집)

by 프리정아 2024. 1. 26.

   영원한 귓속말은 문학동네시인선 001~049 시인들이 자신의 시집에서 고른 한 편의 시와 짧은 산문으로 엮은 특별한 시집이다. 시가 영원한 귓속말이라면 그것은 시가 특별한 종류의 언어적 실천이라는 뜻이고, 그 실천이 멈춰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제목을 정했다고 한다.

   시인이 쓴 많은 시 중에서 자신이 고른 1편의 시는 특별한 시일 것이다. 무엇보다 시 한 편에 이어 나오는 시인이 쓴 산문이 또한 시적인 글이어서 놀랐다. 무엇보다 내가 모르는 시인이 너무 많다는 것과 이분들의 시를 모두 읽으려면 죽기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며 혼자 웃었다.

   시 몇 편과 덧붙인 산문을 함께 적어본다. 시 한 편이 탄생하기까지 시인의 고뇌를 볼 수 있는 산문에 더 마음이 가는 건 왜일까?

 

문학동네시인선 008 성미정 시집- 읽자마자 잊혀져버려도

<김혜수의 행복을 비는 타자의 새벽>

잠에서 깨버린 새벽 다시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다가 생뚱맞게 김혜수의 행복을

빌고 있는 건 인터넷 메인 뉴스를 도배한

김혜수와 유해진의 열애설 때문만은 아닌 거지

 

김혜수와 나 사이의 공통분모라곤

김혜수는 당연히 모르겠지만

신혼 초 살던 강남 언덕배기 모 아파트의

주민들이었다는 것

같은 사십대라는 것 그리고

누구누구처럼 이대 나온 여자

가 아니라는 것 정도지만

 

김혜수도 오늘밤은 유해진과 기자회견

사이에서 고뇌하며 나처럼 새벽녘까지

뒤척이는 존재인 거지 그래도 이 새벽에

내가 주제 높게 나보다 몇 배는 예쁘고

돈도 많은 김혜수의 행복을 빌고 있는

속내를 굳이 밝히자면

 

잠 못 이루는 밤이 점점 늘어만 가고

오늘처럼 잠에서 깨어나는 새벽도

남아도는데 몽롱한 머리로 아무리

물어봐도 뾰족한 답이 없는 우리 집

재정 상태를 고민하느라 밤을 새느니

타자의 행복이라도 빌어주는 편이

맘 편하게 다시 잠드는 방법이란 걸

그래야 가난한 식구들 아침상이라도

차려줄 수 있다는 걸 햇수 묵어

유해진 타짜인 내가 감 잡은 거지

 

오늘 새벽은 김혜수지만 내일은 김혜자

내일모레는 김혜순이 될 수도 있는

이 쟁쟁한 타자들은 알량한 패만

들고 있는 나와는 외사돈의 팔촌도 아니지만

그들의 행복이 촌수만큼이나 아득한 길을

돌고 돌아 오는 세월에 내게도 연결되지

말라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그러니 사실 나는 이 꼭두새벽에

생판 모르는 타자의 행복을 응원하는

속없는 푼수 행세를 하며 정화수 떠놓고

새벽기도 하는 심정으로 나의 숙면과

세 식구의 행복을 간절히 빌고 비는

사십 년 묵은 노력한 타짜인 거지

 

<수정>

어릴 적 강가에서 햇빛에 유난히 반짝이는 돌을 주운 적이 있다.

겉보기엔 평범한 돌멩이인데 살짝 갈라진 틈이 있고

그 안에 유치처럼 수정 같은 것이 몇 개 올라와 있었다

당시에 나는 책에서 수정에 물을 주면 자란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어

그 돌멩이를 집으로 모셔와 아침저녁으로 물을 주고 햇빛을 쬐는 등

식물을 키우듯 정성을 들였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그냥 돌멩이에 불과한 그 돌은 나의 수정이 되었다

투명하고 뾰족한 것이 자라기를 간절하게 기다렸다

그때 그 돌멩이는 이미 어디론가 사라졌고

수정이 자랐는지는 기억도 희미하지만

돌멩이에 물을 주던 마음으로 시를 만나는 순간이 있다

평범하고 무덤덤한 것들에서 수정이 자라는 순간이

 

 

문학동네시인선 009 김안 시집- 오빠 생각

<거미의 집>

골목마다 웅크린 차가운 빛의 알갱이들. 저 한 떼의 시간이 흐르고 나면 당신의 가슴도 텅 빈, 말라비틀어진 두 개의 주머니에 불과하겠지. 이제 여기에 무엇을 담을 수 있을까, 쓸쓸하고 고통스럽게 들춰보며 당신은 당신이 좋아하던 뾰족한 지붕이나 분홍빛 숄, 따뜻한 마늘빵 같은 것들을 고요하게 바라보겠지. 의자는 날이 갈수록 우울해지겠지. 모자를 삐뚜름히 쓴 늙은 우체부가 페달을 밟으며 당신에게 다가와 귓속으로 뜨거운 입김을 불면, 당신의 주머니는 쓸쓸한 짐승의 꿈으로 부풀어오르겠지. 당신이 포옹했던 모든 것들이 절벽이 되겠지. 그때면 모두 죽어 침대 속에 숨겨두었던 우리의 귀마저 멀고 언어의 부스러기들만 창백하게 빛나고 있겠지. 당신은 시인처럼 몇 해 동안 몸속에 품고 있던 돌멩이를 끄집어내 햇볕에 비춰보며 돌의 핏줄이라든가 국적 따위를 읊겠지. 그러고는 골목 구석 쥐새끼처럼 검고 작고 털이 보송보송한 당신의 시간을 향해 내던지겠지. 이제 막 익기 시작한 열매들을 가득 품은 정원은 쏟아지는 햇볕 속으로 천천히 걸어가고 마을은 혼자 불타오르다 구름바다 위로 떠오르고, 당신은 철학자처럼 눈을 껌벅이며 바라보다 희미하게 희미하게 귀가 없는 자들을 위한 노래를 부르겠지. 그러고는 당신의 눈동자와 혀와 흰 손가락과 여윈 종아리를 당신의 주머니 속에 담겠지. 정오를 달려가는 악몽이거나 혹은 무덤이 되겠지. 이윽고 성난 시간의 쥐들이 당신을 깨물면 당신의 텅 빈, 말라비틀어진 두 개의 주머니의 결을 이루던 거미줄은 찢겨진 채 너풀거리겠지. 더 이상 그 어떤 것도 걸려들지 않겠지.

 

<내 쓰기의 운명>

청춘이 끝나니 서정이 끝났다. 이미지를 잃었다. 이제 무엇을 쓸 수 있을까, 이제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오래도록 고민하며 써왔다. 내게 첫 시집은 이 고민이 시작되기 전과, 이 고민과 맞닥뜨리자마자의 기록이다. 그리고 몇 년이 흘렀다. 자고 일어나면 손가락이 없어져 있었다. 밤이 손가락을 씹어 먹는 날이 계속되었다. 말이 쏟아져나오던 시절과, 말이 사라지는 소리에 귀기울이는 시절 간의 거리가 너무 멀어 되돌아갈 수 없었다. 두려웠고, 두렵기 때문에 비굴하게 늙고 싶지도 쓰고 싶지도 않았지만, 때론 이 쓰기라는 직업은 하염없이 부질없어 나의 일상조차도 나락으로 떨어져버리게 했다. 부질없는 쓰기의 나날들이 이어질수록 나의 쓰기에는 단정(斷定)의 단어들이 많아진다. 단정의 단어들은 방어기제다. 나의 쓰기는 나를 무엇으로부터 보호하고 싶어하는 것일까. 용기를 내어, 첫 시집을 펼쳐본다. 부끄러워 출간 후 제대로 정독해보지 못한 첫 시집의 마지막 시에는 텅 비어 말라비틀어진 젖가슴이 바람에 출렁이고 있었다. 더이상 그 어떤 것도 걸려들지 않는 찢겨진 거미의 집이 놓여 있었다. 어쩌면 이것이 나의 쓰기의 운명은 아닐까. 나는 이 운명으로부터 나의 쓰기를 보호하고 싶은 것은 아닐까.

이제 무엇을 쓸 수 있을까. 이제 대체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문학동네시인선 023 이현승 시집- 친애하는 사물들

<따뜻한 비>

삼촌은 도축업자

사실 피 묻은 칼보다 무서운 건

삼촌이 막 잡은 짐승의 살점을 입에 넣어줄 때

 

입속에 혀를 하나 더 넣어준 느낌

입속에선 토막 난 혀들이 뒤섞인다

혀가 가득한 입으론 아무 소리도 낼 수 없다

 

고기에서 죽은 짐승의 체온이 전해질 때

나는 더운 비를 맞고 있는 것 같다

바지 입고 오줌을 싼 것 같다

 

차 속에 빠진 각설탕처럼

나는 조심스럽게 녹아내린다

네 귀와 모서리를 잃는다

 

삼촌이 한 점을 더 넣어준다면

심해 화산의 용암처럼 흘러내려

나의 눈물은 금세 돌멩이가 될 것 같다

 

<한 조각의 시를 위하여>

확실성의 노예가 되지 말아야 한다.

그 누구보다도 나 자신을 그렇게 독려해왔다. 비관이나 낙관은 현실의 입장에서 보자면 얼마나 쉬운가. 어느 쪽이든 나약한 정신의 은신처일 뿐이다.

희망이나 절망 없이, 다만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얼마간 정신의 힘과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네 살짜리 아이가 손바닥만한 인형을 다그치는 소리를 들으면서 미안하지만, 자명한 쪽은 언제나 실패이다. 위안을 얻고자 한다면 한 조각 농담을 들려줄 수 있지만, 스스로가 옥수수라고 생각했던 농담 속의 그 남자처럼 어차피 오래 웃을 수는 없을 것이다.

가장 나빴을 때조차 그게 끝이 아니었다는 것, 그게 위로라면 위로일 수 도 있겠다.

좋은 판사보다 더 드문 것은 세상에 없다는 것을 가슴 속 깊이 죽을 때까지 명심하라.” 라고 말한 것은 쇼펜하우어였다. 문제는 비유가 사실을 가리키고 있을 때이다. 전환이 필요한 것은 기분이 아니다. 삶이다. 닭의 모이의 입장도 있는 거니까.

   

문학동네시인선 033 박지웅 시집- 구름과 집 사이를 걸었다

  <나비를 읽는 법>

나비는 꽃이 쓴 글씨

꽃이 꽃에게 보내는 쪽지

나풀나풀 떨어지는 듯 떠오르는

아슬한 탈선의 필적

저 활자는 단 한 줄인데

나는 번번이 놓쳐버려

처음부터 읽고 다시 읽고

나비를 정독하다, 문득

문법 밖에서 율동하는 필체

나비는 아름다운 비문임을 깨닫는다

울퉁불퉁하게 때로는 결 없이

다듬다가 공중에서 지워지는 글씨

나비를 천천히 펴서 읽고 접을 때

수줍게 돋는 푸른 동사들

나비는 꽃이 읽는 글씨

육필의 경치를 기웃거릴 때

바람이 훔쳐가는 글씨

 

<오로지 시로써>

산 채로 껍질을 벗기는 것이다. 시를 쓰는 일이란 그런 것이다. 육체를 씻는 정도에 그치는 게 아니다. 내 본디의 육체와 영혼을 두껍게 뒤덮고 오랫동안 살갗 행세를 해온 거짓됨과 무지와 환상의 껍데기를 뜯고 벗기는 것이다. 실상과 허상 사이에 엄연한 그 견딜 수 없는 불일치를 해부하고, 잠든 의식은 부검해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깊고 어두운 나무뿌리의 지하에서 나와, 마침내 내 육체와 영혼의 지평선에 떠오르는 경이로운 일출과 마주서는 것이다.

구름과 집 사이를 걸었다는 말, 내 영혼과 삶의 체위가 몽롱하고 불가사의하던 한때를 묶은 말. 그러나 매정하게도, 밖에서 문을 걸어 잠근 지 오래되었다. 폐관인가, 무문인가. 들어오는 문은 있으나, 스스로 나가는 문은 없다. 다만 누군가가 나를 펼쳐 읽을 때, 나는 잠시 드러날 뿐이다. 오로지 시로써 존재할 따름이다. 나는 시인이다.

 

 

문학동네시인선 036 장옥관 시집- 그 겨울 나는 북벽에 살았다

<붉은 꽃>

거짓말 할 때 코를 문지르는 사람이 있다 난생처음 키스를 하고 난 뒤 딸꾹질하는 여학생도 있다

 

비언어적 누설이다

 

겹겹 밀봉해도 새어나오는 김치 냄새처럼 숨기려야 숨길 수 없는 것, 몸이 흘리는 말이다

 

누이가 쑤셔박은 농짝 뒤 어둠, 이사할 때 끌려나온 무명천에 핀 검붉은 꽃

 

몽정한 아들 팬티를 쪼그리고 앉아 손빨래하는 어머니의 차가운 손등

 

개꼬리는 맹렬히 흔들리고 있다

 

핏물 노을 밭에서 흔들리는

수크령

 

대지가 흘리는 비언어적 누설이다

 

<, 당달봉사가 되어야 보이는 빛>

누구나 하는 말이지만, 시는 생물이다. 그렇다는 건, 시가 리듬을 숙주로 삼기 때문이다. 무릇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리듬을 가진다. 시가 말랑말랑해지려면 오로지 몸의 들숨과 날숨에 기대야 한다.

 

그것은 일종의 들림상태를 뜻한다. 작두날 위에 올라간 무당처럼, 백양나무 우듬지에 올라앉은 산새처럼 몸무게를 제로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 언어라는 자전거 안장에 앉아 무작정 페달을 밟아야 한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건 용기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의 결핍이다. 시는 실패하는 순간에 탄생한다. 왜 아니랴, 이제라도 손발 없는 당달봉사가 내미는 손 잡고 제대로 한번 나자빠지고 싶다.

 

나이? 시에게, 시인에게 무슨 나이가 있단 말인가.

 

 

   시에 이어 적힌 시인들의 덧글은 대부분이 비슷한 기조였다. 시를 쓰는 것에 대한 절절한 어려움과 고뇌 등......

   시를 쓴다는 것은 산 채로 껍질을 벗기는 것. 본디의 육체와 영혼을 두껍게 뒤덮고 오랫동안 살갗 행세를 해온 거짓됨과 무지와 환상의 껍데기를 뜯고 벗기는 것. 실상과 허상 사이의 견딜 수 없는 불일치를 해부하고, 잠든 의식을 부검해보는 것. 그리하여 마침내 육체와 영혼의 지평선에 떠오르는 경이로운 일출과 마주 서며 시 한 편이 탄생하는 것이란다.

   자고 일어나면 손가락이 없어져 있고 밤이 손가락을 씹어 먹는 날들이 이어져야 시 한 편이 탄생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탄생한 시집도 스스로 부끄러워 읽어보지 못하는, 시인이란 어떤 사람인지 정의하기가 어려워진다.

   작두날 위에 올라간 무당처럼, 백양나무 우듬지에 올라앉은 산새처럼 몸무게를 제로 상태로 만들어 언어라는 춤곡에 자신을 몰아넣되 자신은 느껴지지 않는 경지에 도달해야 한다니. 너무 어렵다. 시를 짓는다는 것은.

   돌에도 생명을 불어넣는 시인들이 내미는 49편의 시와 그분들의 글에 가슴 저려 보기를 권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