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이면 2 (생의 이면 1에 이어서 적음)
<낯익은 결말>
1
‘우리가 우리의 불행을 스스로 선택했다는 생각만큼 교묘한 위안은 없다.’
그 구절은 화살처럼 날아와서 내 가슴에 박혔다. 보르헤스가 그 순간의 내 심정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박부길 씨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그것도 매우 독창적이고 현저하게 남다른 동기에 의해 선택했다고 주장함으로써 교묘하게 위안을 삼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에게는 위안이 필요하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위로하지 않는다. 그를 위할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그 자신이 잘 안다. 그래서 박부길은 스스로를 위로하고자 한다. 그런 생각이 사라지지 않았다.
목사가 되기로 작정한 동기가 순전히 그 여자에 대한 사랑 때문이라는 그의 주장을 달리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여자란 말인가. 어떻게 신에 대한 인식과 믿음이 전무한 한 영혼이 단지 한 여자 때문에 , 오직 그 여자를 사랑하기 위해서, 순전히 그 방편으로 , 신의 뜻을 지키고 전파하며 살아야 하는 자리로 뛰어들 수 있단 말인가. 적어도 그런 조율의 결단은 좀 더 무겁고 진지한 성찰과 고뇌의 결과물이어야 하지 않을까. 무엇보다 자기가 따르고자 하는 그 신과의 상당한 수준의 친교가 바탕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 목적 또한 자기가 신봉하는 그 신에 대한 절대적인 헌신과 봉헌이어야 하지 않을까. 적어도 그렇게 고백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없다면 우리가 그 영역을 성의 자리로 분별해 놓을 까닭이 어디 있단 말인가.
사랑한다는 고백 대신 그 엉뚱한 결심을 여자에게 말하면서 그의 소설 <지상의 양식>은 멈춘다. 물론 그의 설명대로 이 작품이 미완성이라는 사실은 충분히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그는 틀림없이 더 쓸 이야기가 있었을 것이고, 마땅히 그래야 했다. 그와 같은 결심을 하고 난 이후의 사정이 조금 더 상세하게 기록되었더라면 어느 정도 이해를 확보하기가 용이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그는 거기서 기록을 끝내 버렸다. 그러고는 다시 쓰지 않았다. 적어도 현재까지는 다른 글에도 그런 경험을 대한 언급은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그가 멈춘 곳을 겨냥하고 사유의 그물을 던질 수밖에 없다.
2
교수는 더 따져 묻지 않았다.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서류 위에 무엇인가를 적었다.
더 따지고 들었다면 그는 말했을까. 그는 무슨 말을 했을까. 장학금 없이는 공부할 수 없는 딱한 사정을? 교회에서 알게 된 여선생의 권면? 그녀로부터 받은 신앙적 감화? 그것이 진실일까? 적어도 거짓은 아니다. 그 여선생은 그의 결단에 거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녀는 어떤 식으로든 그의 신학교행에 책임이 있다. 그는 더 이상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 버린 어머니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고, 그렇기 때문에 만일 공부를 계속하고 싶다면 혼자 힘으로 학교에 다녀야 했다는 것도 사실이다. 교회는 가난한 그에게 퍽 관대했다. 그의 결심을 간파한 교회는 그가 신학생이 되면 거처를 제공해 주겠노라고 했다. 성경 공부를 가르치던 여선생은 그의 강력한 정신적 후원자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그의 충동적인 결단이 진지함의 무게를 덧입도록 도와주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한다고 하더라도 그는 자신에게 만족스럽지 못했을 것이다.
3
실제로 두 사람은 많은 유사점을 가지고 있는데, 그 유사점 가운데 가장 눈에 띄고 분명한 한 가지는 폐쇄성이다. 그는 자아의 투사에 다름 아닌 자신의 어둡고 비좁은 자취방에 스스로를 가둔 채 거기서만 일그러진 안정감을 느껴 왔다. 세상의 그 무엇도 그를 위로라지 못했다. 그녀를 만나기까지 모든 사람은 단지 타인이었고, 적이었고, 사물이었고, 지옥이었다.
그녀는 어땠는가? 그녀는 달랐는가?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 들어앉아서 그 밖으로는 나간 적도 없고, 나가려 하지도 않았다고 그녀는 고백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관측을 스스로 한 바 있다. 교회는 그녀의 폐쇄적인 자아를 감출 수 있는 그럴듯한 테두리에 지나지 않았다. 교회가 아니라도, 그녀는 그 무엇으로든 테두리를 만들었을 것이다. 우연히, 또는 불가피하게 교회가 그녀의 울타리가 된 것뿐이다. 박부길의 ‘골방’이 그런 것처럼 그녀의 ‘교회’ 역시 폐쇄적인 공간이다. 그녀의 ‘교회’는 그의 ‘골방’과 똑같다.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세상을 향해 열려 있는, 또는 교회의 가르침을 통해 세상을 확보하게 된 대부분의 기독교인들과는 달리 그녀는 할 수 있는 대로 교회의 내부로만 파고들려고 했다. 그녀는 세상을 알지 못했고, 알려고 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두려워했다.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그 점은 박부길도 마찬가지였다. 그 또한 세상을 두려워했고, 혐오했다. 그들은, 서로 다른 곳에 서 있으면서도 얼마나 같은가. 박부길을 홀린 것은 그녀의 믿음이나 성스러움이 아니라 실은 그와 같은, 가지를 닮은 폐쇄적인 분위기였던 것이다. 박부길은 그녀가 자기와 같은 종족이라는 것을 쉽게 눈치채었고,, 그 점에 매료되었다. 그녀라고 달랐을 까.
물론 나직나직 대화를 나누며 밤을 거의 다 새우기도 했다. 그들의 대화 형식은 선생과 학생의 그것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조건들이 그다지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이 잇다.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심야의 공기가 얼마나 은밀하고 농염한지. 밤의 하늘을 떠도는 공기는 한낮의 그 번잡하고 산만한 공기가 아니다. 어둠이 내려오면서 공기도 바뀐다. 밤에는 왜 통화가 잘되는가. 밤의 특별한 공기 때문이다. 밤에는 웬만해서는 잡음이 섞이지 않는다.
4
신학생이 되자 그는 곧장 기숙사로 들어갔다. 그의 방은 4층이었고, 남향이었다. 아침마다 넓은 유리창을 통해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신입생의 기숙사 입사는 강제로 규정된 의무 조항이었다. 하지만 그런 규정이 없었더라도 그는 기숙사에 들어갔을 것이다. 그에겐 그것 말고 다른 길이 없었다. 이미 다른 사람의 아내이자 그가 알지 못하는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되어 있는 어머니로부터 계속해서 한 달에 한 번씩 돈봉투를 받아 내는 일은, 슬프고 안쓰러운 당신의 입장을 생각해서 그가 스스로 그만두어야 했다. 그가 원한 것은 그를 둘러싸고 있는 인연으로부터의 완전한 단절이었다. 어머니는 최초이자 최후의 끈이었다.
그렇다면 그분은 이제껏 패륜아에 다름 아닌 그 조카에게 기대를 걸고 있었더란 말인가. 고향을 버리겠다고, 아버지 무덤에 불을 지르고 도망친 망나니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시절 어린 조카에게 가했던 자신의 그 집요한 세뇌의 효험을 신뢰하고 있었더란 말인가.
그랬었던 것 같다. 큰아버지는 그가 고시 공부를 할 것이고, 언젠가 합격하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리하여 박부길이 조상들 앞에서 자신의 면목을 세워줄 것이라고 믿었다. 어쩌면 그분이 참으로 신뢰한 것은 조카의 능력이 아니라 자신의 세뇌와 욕망의 효능이었는지 모른다. 그가 눈물을 흘린 것도 조카가 선택한 뜻밖의 진로 그 자체에 해한 실망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기대와 욕망이 좌절된 데 대한 허탈감과 절망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5
그는 학교에서는 도서관의 사서일을 돕고, 일요일에는 교회일을 거들면서 생활에 필요한 돈을 벌기로 했다. 다행히 교회는 그에게 일자리를 주고 적지 않은 액수의 생활비를 제공했다. 학교에서든 교회에서든 일은 별로 힘들지 않았고, 마음은 뜻밖으로 가벼웠다. 그는 이제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둡고 눅눅한 골방을 떠나 햇빛이 환하게 쏟아져 들어오는 기숙사로 그의 거처가 바뀐 것이 이 시절의 그에 대한 하나의 상징이다. 그는 골방에서 신학교로, 어둠에서 빛으로 나왔다. 그 사이에 성스러운 어둠의 공간인 예배당이 있다. 그를 빛으로 이끌어낸 그녀가 있다. 너무나 오랫동안 어둠에 익숙해 있었던 박부길에게 신학교의 생뚱한 밝음이 혹시 어떤 생채기를 입히지는 않았을까, 하고 묻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신학생으로서의 박부길의 모습이 얼른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일은 그에게는 너무 익숙했다. 그의 게걸스러운 책 읽기의 습관은 세상에 대해 수줍음과 적의를 동시에 키워 가던 유년 시절부터 형성된 것이었다. 기름진 풀밭을 발견한 양들은 한 곳에 붙어 서서 께적거리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쪽에서 한 입, 저쪽에서 한 입, 하는 식으로 풀밭을 뛰어다니기부터 한다. 그 모습은 거기 있는 모든 풀들을 조금씩이라도 맛보고 말겠다 작정하고 설치는 것만 같다. 박부길도 그랬다. 도서관이야말로 푸른 초장이었다. 눈앞에 널리 책들 앞에서 그는 행복했다. 언제든 꺼내 읽을 책이 얼마든지 있었기 때문에 그는 신학교가 좋았다. 양들이 그런 것처럼 그도 또한 도서관 진열대 사이를 마구 뒤지고 다니며 널린 책들을 먹어 치웠다. 거기 있는 그 모든 책들의 맛이라도 보겠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으리라. 다른 관심이 생겨날 까닭이 없었으며, 설혹 다른 관심이 생겼다 하더라도 거기에 기울일 시간이 없었다.
6
‘시험잘치르세요종단’
믿어지지 않는 일이야말로 감격의 조건이다. 믿어지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는 뜻이고, 기대하지 않았던 일의 뜻밖의 실현은 사람을 감격의 회오리 속으로 몰아붙이기에 충분하다. 감격의 요인은 실현된 일의 내용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이 실현된 형식에 있다. 갑작스러움과 의외성이 우리를 감격시킨다. 결코 경망스러운 편이 아닌 그녀가 그런 식의 사사로운 인사말을 전보라는 위급 수단을 동원해서 알린 이 의외의 사건은 무엇을 시사하는가. 그녀는 그를 감격시키려고 했던 것일까?
7
그에게 여자란 평생에 둘밖에 없었다. 하나는 어머니이고, 다른 하나는 그녀이다.
그는 알지 못했다. 그의 아버지가 아주 가까운 곳에, 그와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을. 그의 아버지는 감금되어 있었고, 아버지가 감금되어 있는 뒤란의 골방 근처에는 그의 출입이 통제되었다. 그는 상당히 오랫동안 자기에게 금지된 것이 뒤란에 세워져 있는 감나무라고 생각했다. 금령을 내리는 사람은 설명을 하지 않는다. 금기에는 이유나 조건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금령이다. 태초의 정원을 거닐던 야훼가 그러했고 박부길의 큰아버지 역시 그러했다. 명령자는 ‘하지 마라’ 또는 ‘가지 마라’라고 말한다. 수신자는 질문하지 못한다. 금령이 선포되는 통로는 언제나 일방통행이다. 예외는 없다.
그리하여 어느 서럽게 하늘이 맑던 날 오후에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남자, 오이디푸스가 된다. 감금된 남자는 몰래 뒤란으로 들어온 그의 앞에 길게 자란 손톱과 발톱을 내밀고, 보아라, 너무 길고 지저분해서 흉하지 않느냐, 깎아야 하지 않겠느냐, 하고 동의를 구하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는 남자의 눈길이 너무 서글퍼 보여서 그가 원하는 대로 큰아버지의 앉은뱅이책상 서랍을 열고 손톱깎이를 가져다주었다.. 이튿날 새벽에 식구들 몰래 감나무 열매를 주우러 뒤란으로 달아간 박부길은 남자의 늘어진 육신과 흥건한 피를 보았다. 남자는 스스로 손목을 자르고 죽어 있었던 것이다.
살부(殺父) 인식은,그러나 시간의 흐름과 함께 점차 또렷해지면서 자꾸만 그를 괴롭혔다. 아버지는 이제 부재가 아니라 원죄였다. 원죄는 시간으로 지우지 못한다. 윈죄의 무게 앞에서는 시간도 무력하다. 그는 자주 아버지를 살해하는 꿈을 꾸며 잠을 설치곤 했다. 때때로 아버지에게 그가 살해되는 꿈을 꾸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그 사실을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았다. 그럴 수가 없었다. 아무도 그의 편이 아니었으므로, 세상은 그와 너무 달랐으므로, 정신 이상의 아버지가 집안 어른들에 의해 감금된 것처럼 그 또한 세상으로부터 감금되어 있었으므로, 적어도 그 자신을 그렇게 판단하고 일찍부터 세상에 대해 적의를 품고 살아왔으므로.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그들은 일요일 오후에 시간을 내서 만났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과 합석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점차 두 사람만 따로 만나는 기회가 잦아졌다. 박부길은 다른 사람들과 여럿이 섞여 있는 걸 몹시 싫어했고, 어쩌다 그런 자리가 생기면 아주 견디기 어려워했다.
그는 독선적이었다. 바깥에서 바라보는 사람의 눈에 그는 침울하고, 이해할 수 없으며, 폐쇄적이고, 심지어는 괴팍하기까지 한 정신의 소유자로 비쳤다. 신학교는 그의 그런 성격을 더욱 두드러져 보이게 했다. 그는 언제부턴가 자신의 독점욕을 감추려 하지 않았고, 오직 그녀와 둘이서만 시간을 보내고 싶어 했다.. 그녀는 그의 뜻을 되도록 존중하려고 했지만 그 문제로 다투는 일도 있었다.
8
기억건대 그 무렵 ‘정치 신학’이라는 것의 등장이야말로 가장 큰 파문을 일으킨 스캔들 가운데 하나였다 신학의 장으로 들어온 정치, 그러나 사람들은 별로 당황하지 않은 것 같았다. 모두들 똥을 본 쇠파리 떼처럼 윙윙 소리를 내며 주저 없이 달려들 뿐이었다. 그것이 내게는 또 이상했다. 그랬다. 내게는 정치란 한낱 똥이었다. 똥개나 쇠파리가 아니라면 달려들어서는 안 되는, 그럴 이유나 필요가 도무지 없는, 그 ‘똥 같은’ 정치의 틈입을, 그러나 우리 시대의 의식의 판도를 완전히 뒤집어 버렸다. 나는 불안했고 비참했다. 신학교의 강의실까지 쳐들어온 정치의 거센 물결이 불안했고, 그 물결에 몸을 실을 수 없어서 비참했다.
정치는 어느새 누구도 그 영역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허용치 않는 튼튼한 그물이 되어 있었다. 이 그물은 질기고 촘촘했다. 어둑신한 찻집 귀퉁이나 밤늦은 시간의 기숙사에서 정치는 신학이라는 이름을 달고 신학생들을 사로잡았다. 대체로 소곤거렸지만, 때로는 자기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정치는 시대가 우리에게 던진 화두였다. 그것을 통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환상이 시대를 지배했다. 사람들은 그 화두를 풀려고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9
이 시기의 박부길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은 실은 화자인 ‘나’이다. ‘나’는 두 명의 룸메이트가 정치를 주제로 토론을 벌일 때 그들의 열기를 어이없어하는 인물이다. 흔히 ‘나’는 슬그머니 자리를 비켜버린다. 그러고는 혼자 있을 수 있는 곳을 찾는다. 기도실과 도서관이 그곳이다. 그중 보다 아늑하고 더 철저하게 고립적이기로는 기도실이다. ‘나’는 기도실의 어둠을 사랑하는 편이다. 그러나 무엇 때문인지 기도실에서 ‘나’는 오래 있지 못한다. 기도실은 ‘나’에게, 술을 즐기지 않는 사람이 갈증 날 때 마시는 맥주 같다. 한 잔은 맛있고 시원하다. 그러나 두 번째 잔부터는 쓰고 싫다. ‘나’는 기도실에 오래 있다 보면 공연히 불편해져서 그만 서둘러 일어나 버리곤 한다. 그래서 도서관이 언제나 ‘나’의 자리가 된다.
그는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을 기울인다. 종단이라는 여자는 자기의 분신에 불과하다. 그는 그녀를 통해 골방의 어둠을 벗어나지만, 그가 그녀를 택한 것은 실은 그녀 역시 어둠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녀 안에서 자기를 보았다. 자기를 비춰 주는 거울인 그녀에게, 거울인 그녀에 비친 자기 자신에게 그는 사랑을 퍼부었다. 그러니까 그의 그녀에 대한 몰두는 나르시스의 자기애일 뿐인 것이다.
10
우리는 이제 그의 소설 <푸른 의자>를 읽어야 한다. 이 소설은 조금 슬프고 쓸쓸하다. 아마도 작가의 경험이 거의 그대로 복사된 것으로 보이는 이 작품에다 그는, 젊은 시절의 자신의 삶을 받치고 있던 그 지반의 뜻밖의 위태로움과 불안정함을 드러내고 싶었을까.
이 소설은 ‘그때 나는 기숙사 식당 창가에 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로 시작된다. 그녀가 그의 학교를 방문했다. 그는 식당에 앉아서 그녀가 야트막한 언덕을 천천히 걸어 올라오는 모습을 유리창을 통해 보았다. 처음에 그는 그녀일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이런 시간에 이곳에 나타날 까닭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는 밥 먹는 것을 중단하고 창문을 열었다. 그녀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틀림없이 그녀였다. 그녀가 나를 만나기 위해 학교로 직접 찾아오다니……. 그의 가슴은 맹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의아스러움이나 궁금증은 잠시였다. 예정에 없던 만남이 반갑기만 했다 그는 지체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걸음이 빨라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그녀가 언덕을 거의 다 올라왔다고 느낄 즈음에 누군가 그녀를 막아서는 모습이 보였다. 4학년 복학생으로 기억되는, 나이 차이가 꽤 많이 나서 그들이 아저씨라고 부르는 남학생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건네는지 그녀의 얼굴로 미소가 환하게 번졌다. 그는 눈도 깜박하지 않고 주의 깊게 살폈다. 남자가 그녀를 한쪽으로 데리고 가려했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는 눈치 더니,, 기숙사동을 한 번 힐끔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몇 마디 더 이야기를 나누다가 올라왔던 길을 도로 내려갔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천천히 걸어 내려가면서 두 사람은 계속 무슨 이야기인가를 주고받았다. 그 뒷모습이 매우 다정해 보였다.
청바지를 입은 키가 작은 여자가 내게 다가와 말을 걸 때까지 나는 그 텅 빈 휴게실에 혼자서 족히 40분은 앉아 있었다. 청바지와 티셔츠 차림의 간편한 복장에 길지 않은 머리를 한 가닥으로 단단히 묶은 모양이 제법 고집스러워 보이는 그 여자가 나타나는 걸 나는 보지 못했다. 줄곧 복도를 지키고 있었는데, 이 여자는 어디서 나타난 것일까.
“김선배를 기다리지? 김영희 선배......”
나는 곧바로 반응을 나타내 보이지 못했다. 그녀의 이름 뒤에 붙은 ‘선배’라는 호칭이 어쩐지 낯설고 이상했다.
“최기혁 교수님 방에 가봐. 내가 들렀다 오는 길인데 그곳으로 오라고 그러더라.”
“거기 있어요?”
“그래, 교수님 하고 이야기를 하고 계셔......”
어쩌자는 것인가. 나의 감정은 그 순간 더 이상 자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나의 가슴속에서 이글거리는 사납고 어두운 정열 때문에 나는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잠깐 몸의 중심을 잡으려고 휘청거리더니 이내 몸을 비스듬하게 틀면서 계단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바닥에 넘어져서 그녀는 어이없음과 참담함과 치욕스러움과 분노와 당혹감이 엉겨 붙은 복잡한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의 몸에 밴 교양이 표정을 감추려고 했다. 그러나 주지하는 대로 사람의 얼굴은 단순하고 순진해서 그녀의 복잡한 감정의 움직임을 숨기지 못했다. 그녀의 표정은 내부의 감정을 낱낱이 그려 보였다. 계단을 오르거나 내려가던, 또는 오르거나 내려가려던 남학생과 여학생들이 무슨 일이냐며 몰려들었다. 그들은 거의 짐승의 울부짖음에 가까운 남자의 괴성을 들었고, 그의 오른손이 허공을 가르며 그녀의 뺨을 사정없이 갈기는 모습을 보았다.
“나를 우롱하지 마. 도대체 나를 뭘로 아는 거야? 대체 뭐가 그렇게 잘났어? 너는, 너는……. 너는 창녀야!”
그는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어처구니없는 자신의 행동을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악마의 이름을 빌려 왔다. 자기 몸속에 악마가 들어왔던 모양이라고, 자기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잘 알고 있다고,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고, 그러나 그것은 자기가 한 짓이 아니었다고. 편지지는 그가 흘린 눈물로 글자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훼손되었다. 물론 짐작할 수 있는 대로 그런 편지는,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고, 또 마지막도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그는 그때 말고도 너무나 자주 그런 종류의 편지를 썼었다. 그리고 그것이 문제의 심각함이었다. 왜냐하면 마침내 그녀는 그의 ‘완벽한 사랑의 이데아’ 역을’ 감당하는데 지쳤고, 그래서 그 역할을 포기하기로 작정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11
우리는 어렵지 않게 이 사랑의 불구성(不具性)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사랑을 받지 못했고, 배우지도 못했다.
우리의 주인공이 그렇다, 사랑의 기술을 습득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그는 자기감정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다. 그의 사랑은 감정이라는 바다에 키나 돛도 없이 둥둥 떠다니는 허술한 풍선과 같았다. 격랑이 일면 크게 요동쳤고, 파도가 잔잔해지면 부드럽게 흔들렸다. 그는 애인을 향한 돌발적인 신경질과 유아적인 투정을 사랑의 표현인 양 오해했다. 그는 집착과 사랑을 구분할 수 없었다. 열정과 사랑의 차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무관심했다. 그는 사랑이라는 것이 상당한 노력과 의지를 필요로 하는 고도의 기술임을 끝끝내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때문에 그는 사랑이 평화의 상태를 지향한다는 사실에도 공감할 수 없었다. ‘나는 사랑을 전쟁처럼 하고 있었다’고 그는 고백한다. 안타깝지만 사실이었다.
12
그날 이후 박부길은 몹시 우울하고 절망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그날 이후 그녀가 여느 때와 다르게 행동했기 때문이었다. 정작 모욕을 당하는 자리에서는 별일 아닌 것처럼 몸을 털고 일어나 흥분하는 주변 사람들을 오히려 만류했지만, 당장 그다음 날부터 그녀는 태도를 바꿔 버렸다. 그녀가 받은 충격이 어지간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는 잘 먹지도 않았고, 책을 읽지도 않았다. 단지 부끄럽고 안타까웠다. 그는 자기 몸을 물어뜯고 싶었다. 참회의 표시로 자기 옷을 찢었다는 옛날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실제로 자기 몸을 물어뜯는 대신 자기 옷을 찢었다. 어떻게 해서든 그녀의 마음을 돌려서 두 사람의 관계를 예전과 같은 상태로 바꾸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며 그는 틈만 나면 전화통을 붙들었고, 밤마다 편지를 썼다. 한 번만 만나 달라고 사정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빌었다. 다시 관계가 회복된다면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상투적인 다짐을 수십 번도 더 했다. 그러나 그런 기회는 다시 주어지지 않았다.
어느 날 그는 오전 강의를 빼먹고 기숙사를 나섰다. 가슴속이 녹아내리는 듯해서 도저히 그냥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러 날 밤을 새우며 고민한 끝에 그는 어쨌든 그녀를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로부터 응답이 올 때까지 무작정 앉아서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예배당에서 나온 그는 곧장 기숙사로 가지 않았다. 그럴 수가 없었다. 어딘지도 모르는 곳을 이곳저곳 배회했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찻집에 들어가 꽤 긴 시간 동안 앉아 있기도 했다. 그러나 마음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어디든 가서 꽥꽥 고함이나 좀 지르고 싶었다. 그는 한강으로 가서 강물을 보고 악을 썼다. 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괴성이 시뻘건 피를 흘리며 강물 속으로 뚝뚝 떨어져 나갔다. 그는 풀밭에 등을 대고 누웠다. 하늘이 까마득히 먼 곳에 있었다. 그는 손을 내밀어 보았다. 절망이 잘 익은 밤송이처럼 후드득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내렸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슬픔이 밀어닥쳤다. 그는 소리를 내지 않고 울었다.
13
그는 밤마다 편지를 썼다. 눈물로 편지를 썼다. 나의 인생에서 당신을 지우면 나는 무라고 썼다. 당신은 어떤지 모르지만, 나는 당신과 나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고 썼다. 그러나 그녀는 침묵했다.
그는 틈만 있으면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걸어서 그녀의 어머니에게 제발 통화를 하게 해달라고 사정을 했다. 그러나 그는 통화를 할 수 없었다. 한숨과 분노와 절망과 회한과 슬픔이 매일 그의 양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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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기가 있는 복도 끝으로 걸어가는데 그의 가슴은 쿵쿵 뛰기 시작했다. 그는 전화를 걸어온 사람이 그녀일 것이라고 상상했다. 그녀가 마침내 그의 끈질긴 사과의 뜻을 받아들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자신의 인생에서 그녀를 지울 수 없는 것처럼, 그녀 역시 그를 지울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상상했다. 그녀가 아니면 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녀라면, 아, 그녀라면, 나는 무슨 말부터 해야 할까.
‘여보세요’라고 발음할 때, 그의 목소리는 떨렸다. 그러나 그 전화는 그녀에게서 온 것이 아니었다. 전화기 너머에는 뜻밖에도 어머니가 있었다. 뜻밖인 것은 몇 차례의 편지와 한 차례의 방문은 있었지만, 이제껏 전화를 걸어온 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늘 자신 없고 주눅이 들어 있는 목소리, 그것이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언제쯤 그 질긴 자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아마도 그녀는 죽는 순간까지 그 짐을 지고 갈 것이다. 그녀는 고통을 자청함으로써 가혹한 운명의 동정심을 구걸하려 한다. 그것으로 사면을 간청하는 어머니의 태도는, 그러나 아들의 공감을 끌어내지 못했다. 안쓰러움도 잠시, 그는 어머니의 가당치 않은 자책감을 접할 때마다 짜증이 났다. 이번이라고 예외일 리 없었다. 그의 목소리를 저절로 퉁명스러워졌다.
“어쩐 일이에요?”
“잘 있니? 별일 없지?”
“큰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구나.”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분이 돌아가셨다고? 이상한 일이지만, 그 소식을 듣는 순간 아무런 감흥도 일어나지 않았다. 단지 그냥 좀 멍할 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그동안 그분에 대해 전혀 생각을 하지 않고 지냈던 것이다.
15
그녀는 떠났다. 나는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의 소설 <낯익을 결말>은 이렇게 시작한다.
일요일 예배 시간에 마땅히 성가대석에 앉아 있어야 할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박부길은 교회당을 둘러보았다. 어디에도 그녀는 없었다. 이제까지 그녀가 예배에 빠진 적은 없었다. 그녀는, 그가 알고 있는 가장 성실한 신자였다. 그렇다면 그녀에게 무슨 일인가가 생겼다는 뜻이 된다. 무슨 일? 그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그때부터 그의 온 신경은 그녀의 부재에 쏠렸다. 성가대의 찬양도 장로의 기도 소리도 목사의 설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가 없는 교회당은 허전했고, 예배의 순서들은 생기를 잃고 있었다. 그에게 그녀가 없는 것은 전부가 없는 것이었다. 그는 단지 예배가 빨리 끝나기만을 바랐다.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은 여인을 주제로 한 목사의 설교는 진부했고 유난히 더디게 느껴졌다.
예배가 끝나자마자 그는 그녀의 어머니를 찾았다. 그녀는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을 감추지 않은 채로 담담하게 말했다.
“종단이는, 공부를 계속할 생각이라네. 마침 은사님 가운데 장학금을 주선해 준 고마운 분이 계셔서......”
그녀의 어머니는 그 말을 하고서는 서둘러 자리를 비켰다. 믿어지지 않았다. 아니다. 그는 믿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의 무의식은 일찌감치 그 사실을 예감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 때문에 그렇게 불안하고 조마조마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예감하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정작 그 예감이 현실화되었을 때 그것을 용납한다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그녀는 떠났다. 그리고 그는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16
그녀가 그를 떠남으로써 생겨난 상실감은 치명적이었다. 그는 ‘과녁을 잃고 배회하는 화살’처럼 보였고, ‘엉뚱한 곳에 침을 쏘아 버린 대가로 삶을 압류당한 벌’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깟 일로 사람이 그렇게 형편없이 무너질 수 있단 말인가, 하고 묻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그렇게 질문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그렇게 물음으로써 질문자는, 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만을 드러낼 뿐이다. 그의 삶은 헌신의 대상을 잃음으로써 비스킷처럼 바삭바삭해져 버렸다.
17
터무니없는 독아론자인 이 이방인은 2학년 2학기 기말고사를 일주일 앞두고 기숙사를 나온다. 가방 두 개에 짐을 챙겨 넣고 학교를 떠나면서 그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아무도 그가 학교를 떠난 걸 몰랐다. 나중에도 그가 학교를 떠난 이유를 궁금해하거나 아쉬워하지 않았다. 그의 의식 깊은 곳에서 오래 준비된 그 ‘예정된’ 결단은, 그러나 몹시 허술했다.
그의 결정은 다른 곳을 향했다. 사방이 수렁일 때는 수렁에 빠지는 것이 유일하게 가능한 선택이다. 그의 의식은 그의 어둡고 폐쇄적인 자아가 안락을 느끼던 단 한 곳을 기억해 냈다. 고등학교 시절, 그의 어두운 자아를 기꺼이 품어 주던 자취방이었다. 그녀가 그의 삶에 끼여 들어와 빛의 세상으로 불러내기 전까지 그곳은 그의 성전이었다. 금방이라도 폭삭 주저앉을 듯 낮은 천장, 하루 종일 햇빛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북향으로, 그나마도 벽에 맞대서 뚫린 손바닥만 한 창문, 언제나 습기가 배어 눅눅한 느낌을 주는 방바닥……. 세상과 사귀지 못하고 늘 불편한 관계를 유지해 오던 불만투성이의 어두운 소년은 적의와 슬픔으로 얼룩진 대부분의 시간을 그 방의 어둠 속에서 보냈었다.
그는 다시 2년 전의 박부길이 되어 자기 방에 틀어박혔다. 거의 모든 시간을 그 좁고 어둡고 눅눅한 방 속에 틀어박혀서 지냈다. 그는 어둠과 급속도로 친해졌다. 자신의 몸이 어둠의 일부가 되어 버리는 그 신비스러운 합일의 경지가 그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상태였다. 그에게는 그런 신비를 체험한 경험이 있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어둠 속에 오랫동안 몸과 의식을 잠근 채 꼼짝하지 않고 있다 보면 사물들이 나름대로의 형상을 빚어 보이기 시작한다. 그런 뜻에서 어둠도 빛이다. 그는 전에 그 어둠의 빛에 의지하여 책들을 읽었다. 그때 읽었던 ‘지하생활자의 수기’는 그의 가방에 아직도 들어 있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어둠이 그와 충분히 친해졌을 때, 박부길은 어둠이 뿜어내는 빛 아래 웅크리고 앉아 충동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지난 중학교 시절의 우스꽝스러운 필화 사건 이후 그는 자신이 일기를 쓰는 일 외에 무슨 글을 쓸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가슴을 답답하게 가로막고 있는 그 무겁고 큰 덩어리를 어떻게든 떨어내고자 하는 욕망 때문이었는지 그이 글은 뜻밖에 속도가 빨랐다. 몇 장 나가지 않아서 자연스럽게 그 글의 제목이 떠올랐다. 그는 맨 윗장에 <좁은 문>을 쓴 작가의 또 다른 책명에서 빌려 온 제목을 역시 충동적으로 적어 넣었다.
‘지상의 양식’
그리고 그는 여러 날의 무위도식을 끝내고 시골 교회의 한쪽 방에 묻혀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석 달 동안 한 편의 중편소설과 두 편의 단편소설을 썼다. 그 가운데 하나가 그의 데뷔작인 <나그네의 집>이다. 중학교 때 국어 선생으로부터 상상력의 위험을 경고받은 바 있는 작문 <아버지>의 세련된 늘이기에 다른 아닌 이 작품을 씀으로써 그는 막혔던 글의 길을 비로소 뚫었는데, 거기 그의 글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지금은 얼굴도 선명하지 않은 국어 선생이나 윤리 선생의 경고가 아니라 아버지에 대한 그의 잠재된 죄의식이었다. 그는 그 죄의식을 노출하여 공식화함으로써 아버지를 인정하고자 했다. 부재였을 때 아버지는 그를 괴롭혔다. 그는 이해했다. 어떤 몸부림과 부정의 제스처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자신의 삶에서 아버지를 떨쳐 버릴 수 없다는 것을, 왜냐하면 아버지는 그 안에 살아 있었으므로.
그가 해낸 것은 아버지와의 값싼 화해가 아니다. 그보다 훨씬 교묘한 것이다. 죄의식의 되돌림. 아버지는, 그가 그랬던 것처럼, 그에게 고통당하기 시작한다. 고통을 통해 그는 아버지를 이해하고, 아버지를 껴안는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의 글쓰기는 감춰진 것의 드러내기이다. 그 드러내기는 그러나 감추기보다 더 교묘하다. 그것은 전략적인 드러냄이다. 말을 바꾸면 그는 감추기 위해서 드러낸다. 그가 읽은 대부분의 신화들이 그러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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