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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며/시. 소설. 수필.

이 시대의 사랑 (최승자 시집)

by 프리정아 2024. 1. 23.

문학과 지성 시인선 최승자 시인의 이 시대의 사랑시집을 읽었다.

이제껏 본 시집과는 달리 시의 제목이 시의 아래쪽에 있어서 제목에 갇히지 않고 시를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오로지 최승자 시인의 시만 수록되어 있어서 선입견 없이 시의 느낌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시인 이성복에게라는 시가 있어서 반가웠다. 시를 읽으며 이성복 시인의 시와 연관 지어보는 것도 의미가 있었다.

이 시집처럼 제목을 아래쪽에 적으면서 마음이 흐르는 대로 몇 편의 시를 옮겨 적어 본다.

 

현기증 꼭대기에서 어질머리 춤추누나,

아름다운 꼽추 찬란한 맹인.

환상이 네 눈을 갉아먹었다.

현실이 네 눈에 개눈을 박았다.

(그래서 네겐 바람의 빛깔도 보이지)

 

가장 낮은 들판을 장난질하며

흐르는 물, 물의 난쟁이

가장 높은 산맥을 뛰어넘는

키 큰 바람, 바람의 거인

 

행복이 없어 행복한 너

절망이 모자라 절망하는 너

무엇이나 되고 싶은 너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은 너

 

영원히 펄럭이고저!

눈알도 아니 달고

척추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

바다의 날개......

하늘의 지느러미......)

    < 시인 이성복에게 >

 

일찍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주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가면서

일찍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너를모른다 나는너를모른다.

너당신그대, 행복

, 당신, 그대, 사랑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 일찍이 나는 >

 

예스24의 책 소개를 보니 시인 최승자는 정통적인 수법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던 뜨거운 비극적 정열을 뿜어 올리면서 이 시대가 부숴뜨려온 삶의 의미와 그것의 진정한 가치를 향해 절망적인 호소를 하고 있다. 이 호소는 하나의 여성이기에 앞서 인간으로서의 사랑과 자유로움을 위한 언어적 결단이기도 하다.’라고 했다.

이처럼 처절하게 적나라할 수 있을까? 아무것도 아닌 아니, 있어도 없어도 아무도 모르는 여자 아이, 곰팡이나 지린 오줌 자국처럼, 시체처럼 환영받지 못하는 자신, 자신을 알아줄 이 아무도 없는 존재에 대한 절망감......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온다.

매독 같은 가을.

그리 죽음은, 황혼 그 마비된

한쪽 다리에 찾아온다.

 

모든 사물이 습기를 잃고

모든 길들의 경계선이 문드러진다.

레코드에 담긴 옛 가수의 목소리가 시들고

여보세요 죽선이 아니니 죽선이지 죽선아

전화선이 허공에서 수신인을 잃고

한번 떠나간 애인들은 꿈에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고 괴어 있는 기억의 폐수(廢水)

한없이 말 오줌 냄새를 풍기는 세월의 봉놋방에서

나는 부스스 죽었다 깨어난 목소리로 묻는다.

어디만큼 왔나 어디까지 가야

강물은 바다가 될 수 있을까.

    < 개 같은 가을이 >

 

사랑은 언제나

벼락처럼 왔다가

정전처럼 끊어지고

갑작스런 배고픔으로

찾아오는 이별.

 

사내의 눈물 한 방울

망막의 막막대해로 삼켜지고

돌아서면 그뿐

사내들은 물결처럼 흘러가지만,

 

허연 외로움의 뇌수 흘리며

잊으려고 잊으려고 여자들은

바람을 향해 돌아서지만,

 

땅거미 질 무렵

길고 긴 울음 끝에

공복의 술 몇 잔,

불현듯 낄낄거리며 떠오르는 사랑,

그리움의 아수라장.

 

흐르는 별 아래

이 도회의 더러운 지붕 위에서,

여자들과 사내들은

서로의 무덤을 베고 누워

내일이면 후줄근해질 과거를

열심히 빨아 널고 있습니다.

    < 여자들과 사내들 >

 

1

어디까지갈수있을까 한없이흘러가다보면

나는밝은별이될수있을것같고

별이바라보는지구의불빛이될수있을것같지만

어떻게하면푸른콩으로눈떠다시푸른숨을쉴수있을까

어떻게해야고질적인꿈이자유로운꿈이될수있을까

 

2

어머니 어두운 배 속에서 꿈꾸는

먼 나라의 햇빛 투명한 비명

그러나 짓밟기 잘하는 아버지의 두 발이

들어와 내 몸에 말뚝 뿌리로 박히고

나는 감긴 철사줄 같은 집에서 깨어나려 꿈틀거렸다

아버지의 두 발바닥은 운명처럼 견고했다

나는 내 피의 튀어오르는 용수철로 싸웠다

잠의 잠 속에서도 싸우고 꿈의 꿈 속에서도 싸웠다

 

3

바람 불면 별들이 우루루 지상으로 쏠리고

왜 어떤 사람들은 집을 나와 밤길을 헤매고

왜 어떤 사람들은 아내의 가슴에 손을 얹고 잠들었는가

왜 어느 별을 하얗게 웃으며 피어나고

왜 어느 별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추락하는가

조용히 나는 묻고 싶었다

인생이 똥이냐 말뚝 뿌리 아버지 인생이 똥이냐 네가 그렇게 가르쳐줬느냐 낯도 모르는 낯도 모르고 싶은 어느 개뼉다귀가 내 아버지인가 아니다 돌아가신 아버지도 살아계신 아버지도 하나님 아버지도 아니다 아니다

내 인생의 꽁무니를 붙잡고 뒤에서 신나게 흔들어대는 모든 아버지들아 내가 이 세상이 소풍 나온 강아지 새끼인 줄 아느냐

 

자신이왜사는지도모르면서 육체는아침마다배고픈시계 얼굴을하고 꺼내줘어머니세상의어머니 안되면 개복수술이라도 해줘 말의창자속같은미로를 나는걸어가고 너를부르면푸른이끼들이 고요히떨어져내리며 너는이미떠났다고대답했다 좁고캄캄한길을 나는 기차화통처럼달렸다 기차보다앞서가는 기적처럼달렸다 어떻게하면 너를 만날수있을까 어떻게달려야 항구가있는 바다가 보일까 어디가지가야 푸른하늘베고누운 바다가 있을까

     < 다시 태어나기 위하여 >

 

모두가 바캉스를 떠난 파리에서

나는 묘비처럼 외로웠다.

고양이 한 마리가 발이 푹푹 빠지는 나의

습한 낮잠 주위를 어슬렁거리다 사라졌다.

시간이 똑똑 수돗물 새는 소리로

내 잠 속에 떨어져 내렸다.

그러고서 흘러가지 않았다.

앨튼 존은 자신이 예술성이 한물갔음을 입증했고

돈 맥글린은 아예 뽕짝으로 나섰다.

송x식은 더욱 원숙해졌지만

자칫하면 서xx처럼 될지도 몰랐고

그건 이제 썩을 일밖에 남지 않은 무르익은 참외라는 뜻일지도 몰랐다.

 

그러므로, 썩지 않으려면

다르게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다르게 사랑하는 법

감추는 법 건너뛰는 법 부정하는 법.

 

그러면서 모든 사물의 배후를

손가락으로 후벼 팔 것

절대로 달관하지 말 것

절대로 도통하지 말 것

언제나 아이처럼 울 것

아이처럼 배고파 울 것

그리고 가능한 한 아이처럼 웃을 것

한 아이와 재미있게 노는 다른 한 아이처럼 웃을 것.

    < 올 여름의 인생 공부 >

 

이 시처럼 나도 썩지 않으려면 다르게 원하고, 다르게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겠다. 뻥튀기처럼 반응하기보다 속으로 승화하고 삭이며 때로 감추고 건너뛰기도 하며 적당히 눈감을 줄도 알아야겠다. 아닌 건 아니라고 부정하기도 하며 살아야겠다.

그러면서 모든 사물의 배후를 손가락으로 후벼 팔 것, 절대로 달관하지 말 것, 절대로 도통하지 말 것.

언제나 배고픈 아이처럼 울 것, 작은 것 하나에도 세상을 얻은 아이처럼 웃을 것.

책에서, 길에서 내 인생 공부의 방향을 다시 정립해 봐야겠다.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시큰거리는 치통 같은 흰 손수건을 내저으며

놀라 부릅뜬 흰자위로 애원하며.

 

내 꿈은 말이야. 위장에서 암세포가 싹트고

장가가는 거야, 간장에서 독이 반짝 눈뜬다.

두 눈구멍에 죽음의 붉은 신호등이 켜지고

피는 젤리 손톱은 톱밥 머리칼은 철사

끝없는 광물질의 안개를 뚫고

몸뚱어리 없는 그림자가 나아가고

이제 새로 꿀 꿈이 없는 새들은

추억의 골고다로 날아가 뼈를 묻고

흰 손수건이 떨어뜨려지고

부릅뜬 흰자위가 감긴다.

 

오 행복행복행복한 항복

기쁘다우리 철판깔았네

    < 삼십 세 >

 

하늘과 방 사이로

빗줄기는 슬픔의 악보를 옮긴다.

외로이 울고 있는 커피잔

무위(無爲)를 마시고 있는 꽃 두 송이

누가 내 머릿속에서 오래 멈춰 있던

현을 고르고 있다.

 

가만히 비집고 들어갈 수 있을까.

흘 위에 괴는 빗물처럼

다시 네 속으로 스며들 수 있을까.

투명한 유리벽 너머로

너는 생생히 웃는데

지나간 시간을 나는 증명할 수 없다.

네 입맞춤 속에 녹아 있던 모든 것을

다시 만져볼 수 없다.

 

젖은 창밖으로 비행기 한 대가 기울고 있다

이제 결코 닿을 수 없는 시간 속으로

    < 비오는 날의 재회 >

 

, 이제는 놓아버리자

우리의 메마른 신경을.

바람 저물고

풀꽃 눈을 감듯.

 

지난여름 수액처럼 솟던 꿈

아직 남아도는 푸른 피와 함께

땅속으로 땅속으로

오래전에 죽은 용암의 중심으로

부끄러움 더러움 모두 데리고

터지지 않는 그 울음 속

한 점 무늬로 사라져야겠네.

    < 가을의 끝 >

 

넋 없이 뼈 없이

비가 온다

빗물보다 빗소리가 먼저

강을 이룬다

허공을 나직이 흘러가는

빗소리의 강물

내 늑골까지 죽음의 문턱까지

비가 내린다

물의 방에 누워

나의 꿈도 떠내려간다

    < 장마 >

 

이제 그대의 오랜 내력에 대해 이야기하라

머리채 휘두르는 실의의 밤바다 위에서

천 밤을 떠도는 의식의 별,

그대의 비인 뼛속에 몸져누운 어둠에 대해

끝내 쿨럭이며 돋아나는 회한과

무엇이 폐 벽을 뚫고 웅웅대는가를.

 

닿을 길 없이 무수히 떠나는 그림자를 쫓아

한 마리 미친 말을 타고 달리는 그대

그대 의식의 문 뒤에서 숨어 우는 자유와

달빛에도 부끄러운 생채기마저 이야기하라.

 

간간 뼈앓이하는 밤바다에서

피 묻은 부리로 상징을 물고 돌아오는 백조

감성의 늪에서 부끄러운 울음 우는

짐승에 대해 다시금 이야기하라.

    < 내력 >

 

저무는 어디에서 기다리리.

알 수 없는 뿌리로 떠돌다

()의 끝에서 만나는

그리운 그리운 육신(肉身)

지친 홀로의 이름들이

저세상 바람 소리 빗소리

독한 노래로 젖어들 때

이 무게를 지워다오

이 무게를 지워다오

몸부림치는 저승의 달빛

 

사물이 저 혼자서 저문다

세상 밖으로 그대는

그대의 뿌리를 내린다.

    < 황혼 >

 

불러도 삼월에는 주인이 없다

동대문 발치에서 풀잎이 비밀에 젖는다.

 

늘 그대로의 길목에서 집으로

우리는 익숙하게 빠져들어

세상 밖의 잠 속으로 내려가고

꿈의 깊은 늪 안에서 너희는 부르지만

애인아 사천 년 하늘빛이 무거워

< 이 강산 낙화유수 흐르는 물에 >

우리는 발이 묶인 구름이다.

 

밤마다 복면한 바람이

우리를 불러내는

이 무렵의 뜨거운 암호를

죽음이 죽음을 따르는

이 시대의 무서운 사랑을

우리는 풀지 못한다

    < 이 시대의 사랑 >

 

펄떡이는 날 생선을 보듯 거칠 것 없는 언어가 날 후벼판다. 정적이고 뭔가 멋스럽게 포장한 시와는 거리가 멀다. 고통이 고통으로 다가올 수 있도록, 아니 그 이상을 언어로 표현하는 시어의 조탁이 시를 살아 꿈틀거리게 한다.

최승자 시인의 시집으로

즐거운 일기

기억의 집

내 무덤, 푸르고

연인들

쓸쓸해서 머나먼

물 위에 씌어진

빈 배처럼 텅 비어‘

등이 있다고 하니 시인의 시를 읽어보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