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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며/시. 소설. 수필.

그 겨울 나는 북벽에서 살았다(장옥관 시집)

by 프리정아 2024. 3. 20.

문학동네시인선 36번째 시집으로 장옥관 시인의 시집을 읽었다. 담벼락의 비닐봉지 하나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 날 선 시인의 언어에 푹 빠졌다. 시집의 정가가 8000원이라는 것이 너무 이상한, 그러면서 시집 한 권을 사보지 않는 나의 모순을 발견하게 된다. 나와 주위의 모든 소리, 냄새, 움직임, 형상 등 살아 숨 쉬는 언어, 날름거리고 날뛰는 말들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적어본다. 시인의 다른 시집도 찾아보리라.  

 

그 귀는 수평이다 너무 큰 귓바퀴다

 

뭉쳐졌다 풀리는 구름의 뒤척임을 듣는다 여뀌풀씨 터지는 소리를 삼킨다 미끄러지는 물뱀의 간지럼도 새긴다

 

소리의 무덤이다 콩죽 끓듯 빠져드는 빗방울 깨물며 소리를 쟁인다 소리가 동심원을 그리며 번져나가는 걸 본다 잎새들 입술 비비는 소리가 나이테를 그리듯

 

모로 누워 베개에 귀 붙이면 부스럭부스럭 뒤척이는 소리 쉰 해 동안 내 몸으로 빠져든 온갖 소리들 속삭이는 소리 숨 몰아쉬는 소리 울부짖는 소리 숨죽여 우는 소리......

 

들여다보면 소리들 삭아 부글거리는 검은 뻘

 

호수가 얼음 문 닫아걸 듯 나 적막에 들면, 빠져든 소리들은 다 어디로 새어나갈까 받아먹은 소리 다 내뱉으면 그게 죽음일까 들이마신 첫 숨 마지막으로 길게 내뱉듯이  

 

이 시에 제목을 붙인다면 무엇을 붙이고 싶은가?

무엇에 관해 썼는지 시만 읽어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구름의 뒤척임까지 듣는 엄청나게 큰 귓바퀴이면서 여뀌풀씨 터지는 미세한 소리도 삼키고 물뱀의 간지럼도 새기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정체는? 스무고개 하듯 시를 읽으며 도대체 무얼 쓴 걸까 제목을 찾아보면 상상의 날개가 마구 돋아나 자유롭게 저 하늘을 날아가도 놀랍지 않은(‘마법의 성에서 인용) 시의 세계에 빠질 수가 있을 것이다.

시의 제목은 호수였다. 호수에 대한 시인의 탐구는 어마어마했다. 호수에 비가 올 때 콩죽 끓듯 빠져드는 빗방울, 그 빗방울을 깨물다니, 그 빗방울들을 모두 품에 안아 쟁여두는 호수의 속성을 이렇게 세밀하게 찾을 수 있을까? 호수 속에 비친 구름의 뒤척임, 여뀌풀씨 터지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 민감성, 포용성, 소리가 동심원을 그리며 번져나가고 잎새들의 입술 비비는 소리가 나이테를 그리는 소리까지 다 쟁여두는 호수. 밤새 뒤척이는 자식들의 움직임까지 지나치지 않는 어머니의 모습이고, 맛난 것 쟁여두었다 손자 입에 넣어주는 할머니 모습이다.

남자 시인이라서 팥죽 등을 끓여보지도 않았을 텐데 이런 시어가 나오다니. 생각해 보면 비가 오면 호수면이 죽 끓듯 표면이 흔들린다. 팥죽은 아래서 위로 솟구치지만 빗방울은 위에서 아래로 떨어져도 그 방울이 다시 솟구치기도 한다.

호수의 귓바퀴로 들은 소리들이 부글거리고 일렁이고 내뱉아 살아있는, 그래서 시를 읽는 동안 호숫가에서 나옴직한 온갖 소리들과 인간 군상들이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시인의 엄청난 상상력에 압도당했다.

   

< 고등어가 돌아다닌다 >

 

고등어가 공기 속을 유유히 돌아다닌다

부엌에서 굽다가 태운 고등어가

몸을 부풀려

공기의 길을 따라 온 집 구석구석을 돌아다닌다

반갑지도 않은데 불쑥 손목부터 잡는

모주군 동창처럼

내 코를 만나 달라붙는다. 미끌미끌한

미역줄기 소금기 머금은 물살이 문득 만져진다

고등어가 바다를 데리고 온 것이다.

이 공기 속에는

얼마나 많은 죽음이 숨겨져 있는가

화장장 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는

이름과 이름들

황사바람에 섞여 있는 모래와 뼛가루처럼

어딘가에 스며 있는 땀내와 정액.

비명과 신음

내 코는 고등어를 따라

모든 부재를 만난다

부재가 죽음 속에서 머물고픈 모양이다

 

반갑지도 않은 고등어 탄 냄새로 바다의 미역냄새 소금기와 물살이 함께 오고 고등어의 죽음까지, 그리고 죽어서 더 이상 이곳에 없는 다른 수많은 존재들을 불러왔다. 부재하지만 부재가 아닌, 냄새로라도 여기 머물고픈 그 어떤 존재의 현신이랄까? 내 생이 다할 때 냄새로나 바람으로나 민들레 홀씨처럼 작은 형상으로라도 사랑하는 이 곁에 머물고 싶은, 그 주위에 얼쩡거리고 싶은 마음들은 아닐까?

내 코는 고등어를 따라/ 모든 부재를 만난다.

시인의 감각이 어떠해야하는지, 그 감각의 한 자락을 엮어서 이 시가 탄생하기까지 시인의 땀내와 비명과 신음이 들리는 듯하다.

   

< 나사못 박듯 송두리째 >

 

강변에 줄지어 선 미루나무

언젠가 도색잡지에서 본 무성한 음모처럼

빽빽한 잎 달고 휘청휘청

온몸을 흔들고 있다 십자드라이버 돌리듯

흔들릴 때마다 한 뼘씩

거꾸로 땅에 박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펌프질

지맥 속 흐르는 물을 곧추세워 우듬지까지

보내기 위한 움직임인 것

바닥에 남은 포도주스를 스트로로 빨아 당기듯

세차게 빠는 동작이다

그래서일까 포르노 테이프의 저 벌거벗은 사람

서로 몸 끼워 넣고

한사코 펌프질이다 나사못 박듯 송두리째

저를 쑤셔 박고 몸속에 고인 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빨아 당기려는 듯

시궁창 곁 봄풀이 유난히 짙푸르듯이

두두룩한 불두덩 털이 더 기름지고 무성한

까닭은 시도 때도 없이 퍼올리는

펌프질 때문이다

아무리 구경 큰 소방호스로 쏘아대도

저 초록 불길은 끌 수가 없다

 

미루나무의 흔들림을 십자드라이버로 돌려 땅에 박는 것을 연상하였고 그것은 나무가 펌프질 하여 물을 나무 맨 꼭대기까지 보내기 위해 행동으로 보았다. 미루나무의 흔들림에서 나무가 뿌리에서 물을 보내기 위해 세차게 물을 빨아올려 송두리째 자신을 불사르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니. 나무가 자라 열매를 맺고, 그 나무로 인해 뭇 생명이 살아가듯 인간의 불길도 끊이지 않고 이어져가야 할 숭고한 이유다. 오늘날 인구절벽을 걱정하는 우리 사회에 이 시를 들려주고 싶어 진다.

 

< >

 

흰 비닐봉지 하나

담벼락에 달라붙어 춤추고 있다

죽었는가 하면 살아나고

떠올랐는가 싶으면 가라앉는다

사람에게서 떨어져 나온 그림자가 따로

춤추는 것 같다

제 그림자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그것이

지금 춤추고 있다 죽도록 얻어맞고

엎어져 있다가 히히 고개 드는 바보

허공에 힘껏 내지르는 발길질 같다

저 혼자서는 저를 드러낼 수 없는

공기가 춤을 추는 것이다.

소리가 있어야 드러나는 한숨처럼

돌이 있어야 물살 만드는 시냇물처럼

몸 없는 것들이 서로 기대어

춤추는 것이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나를 할퀴는

사랑이여 불안이여

, 내 머릿속 헛것의 춤

 

담벼락에 달라붙어 흔들리고 부풀어 올랐다가 가라앉기도 하는 비닐봉지에서 몸 없는 것들이 서로 기대어 춤추는, 공기의 춤이라니. 내 머릿속 헛것의 춤, 사랑에 빠진 이를 이 보다 잘 묘사할 수 있을까?

   

< 북대(北臺) >

 

그 겨울 나는 북벽에서 살았다.

얼어붙은 북극 바다를 깨고 나가는 쇄빙선처럼 깎아지른 바위에 얼굴을 묻고 살았다

밤마다 산돼지 울음소리 깊은 골짜기를 달리고

손마디 꺾으면 뒷산 상수리나무 굵은 가지가 툭, , 부러졌다

잔등에 내리는 싸락눈을 맞으며

여물 씹는 늙은 소

긴 속눈썹에 맺히던 물방울

 

두터운 외투를 입고 밤은 서둘러 산을 내려오고 며칠째 내린 폭설에 마음은 갇혀

손발 없는 전봇대만 끊어진 길을 이어냈다

발진처럼 부풀어 오른 청춘은 가려움만 더해 종이 위 활자는 절뚝거리며 무릎을 꿇었고

얼어붙은 잉크병을 가스라이터로 녹일 때

파란 불꽃이 너인가도 했다

정신은 더욱 맑아져 온몸 뼈마디 관절마다 찬 샘물이 솟았고 허기 견디다 못해

고드름을 잘라 어둠 깨트리면 이윽고

여명이 핏물처럼 번져 나왔지

절벽으로 기어코 기어오른 자작나무, 그가 움켜쥔 북벽의 화강암을 쇄빙선처럼 이마로 깨며 나는

바위의 황홀한 가족이 되고 싶었다

 

장옥관 시인의 모든 시를 옮겨 적고 싶지만 이 책의 내용의 전부 또는 일부를 재사용하려면 반드시 양측의 서면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라는.’ 글이 무서워 이만 적는다. 문학동네의 시와 시인의 허락을 미리 구하지 못한 점을 너그러이 받아주시고 많은 사람들이 시인의 시를 읽는 날이 오도록 두 손을 모아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