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지성 시인선 80번째 시집으로 기형도 시인의 ‘입 속의 검은 잎’ 시집을 읽었다.
안도현 시인이 쓴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는 책을 읽다가 기형도 시인이 쓴 ‘엄마 걱정’이라는 시가 소개되어 읽어보게 되었다.
시인은 28세의 나이로 시집 출간을 앞두고 종로구의 파고다극장에서 소주 한 병을 든 채로 숨진 채 발견되었다고 한다. 사인은 뇌졸중이었다. ‘입 속의 검은 잎’은 첫 시집이자 유고작인 셈이다. 시를 읽으며 시인의 생애가 겹쳐져서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 엄마 걱정 >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 간 창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열무 삼십 단, 온 가족의 생의 무게를 감당하며 시장으로 가신 어머니의 천근 발걸음이 느껴진다. 팔리지 않는 열무를 앞에 두고 기다리는 자식 생각에 마음이 바쁠 어머니의 모습도 겹쳐온다.
시든 해처럼 엄마 기다리다 지친 아이의 모습, 아무도 돌봐주지 않아 찬밥처럼 춥고 외로이 방에 있는 아이. 엄마가 오시나 귀 기울여 들어도,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안 오시는 엄마. 춥고 무섭고 외롭고, 빈 방에서 오로지 엄마 발소리만 기다리는 아이의 모습이 떠올라 나도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 안개 >
1
아침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2
이 읍에 처음 와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다.
앞서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들처럼 그들은
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
어떤 날은 두꺼운 공중의 종잇장 위에
노랗게 딱딱한 태양이 걸릴 때까지
안개의 군단은 샛강에서 한 발자국도 이동하지 않는다.
출근길에 늦은 여공들은 깔깔거리며 지나가고
긴 어둠에서 풀려나는 검고 무뚝뚝한 나무들 사이로
아이들은 느릿느릿 새어 나오는 것이다.
안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처음 얼마 동안
보행의 경계심을 늦추는 법이 없지만, 곧 남들처럼
안개 속을 이리저리 뚫고 다닌다. 습관이란
참으로 편리한 것이다. 쉽게 안개와 식구가 되고
멀리 송전탑이 희미한 동체를 드러낼 때까지
그들은 미친 듯이 흘러다닌다.
가끔씩 안개가 끼지 않는 날이면
방죽 위로 걸어가는 얼굴들은 모두 낯설다. 서로를 경계하며
바쁘게 지나가고, 맑고 쓸쓸한 아침들은 그러나
아주 드물다. 이곳은 안개의 성역이기 때문이다.
날이 어두워지면 안개는 샛강 위에 한 겹씩 그의 빠른 옷을 벗어놓는다. 순식간에 공기는
희고 딱딱한 액체로 가득 찬다. 그곳으로
식물들, 공장들이 빨려들어가고
서너 걸음 앞선 한 사내의 반쪽이 안개에 잘린다.
몇 가지 사소한 사건도 있었다.
한밤중에 여직공 하나가 겁탈당했다.
기숙사와 가까운 곳이었으나 그녀의 입이 막히자
그것으로 끝이었다. 지난겨울엔
방죽 위에서 취객 하나가 얼어 죽었다.
바로 곁을 지난 삼륜차는 그것이 쓰레기 더미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불행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니다.
안개가 걷히고 정오 가까이
공장의 검은 굴뚝들은 일제히 하늘을 향해
젖은 총신을 겨눈다. 상처 입은 몇몇 사내들은
험악한 욕설을 해대며 이 폐수의 고장을 떠나갔지만
재빨리 사람들이 기억에서 밀려났다. 그 누구도
다시 읍으로 돌아온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 대학 시절 >
나무의자 밑에는 버려진 책들이 가득하였다
은백양의 숲은 깊고 아름다웠지만
그곳에서는 나뭇잎조차 무기로 사용되었다
그 아름다운 숲에 이르면 청년들은 각오한 듯
눈을 감고 지나갔다. 돌층계 위에서
나는 플라톤을 읽었다, 그때마다 총성이 울렸다
목련철이 오면 친구들은 감옥과 군대로 흩어졌고
시를 쓰던 후배는 자신이 기관원이라고 털어놓았다
존경하는 교사가 있었으나 그분은 원체 말이 없었다
몇 번의 겨울이 지나자 나는 외톨이가 되었다
그리고 졸업이었다,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
현실에 발 붙이고 사는 청년의 갈등과 시대상을 볼 수 있는 시이다. 높고 아름다운 뜻을 따르고 싶지만 눈앞의 현실을 생각하면 눈 감을 수밖에 없는 시인의 모습이 슬프게 다가온다.
< 가는 비 온다 >
간판들이 조금씩 젖는다
나는 어디론가 가기 위해 걷고 있는 것이 아니다
둥글고 넓은 가로수 잎들은 떨어지고
이런 날 동네에서는 한 소년이 죽기도 한다.
저 식물들에게 내가 그러나 해줄 수 있는 일은 없다
언젠가 이곳에 인질극이 있었다
범인인 ‘휴일’이라는 노래를 틀고 큰 소리로 따라 부르며
자신의 목을 긴 유리조각으로 그었다
지금은 한 여자가 그 집에 산다
그 여자는 대단히 고집 센 거위를 기른다
가는 비......는 사람들의 바지를 조금 적실 뿐이다
그렇다면 죽은 사람의 음성은 이제 누구의 것일까
이 상점은 어쩌다 간판을 바꾸었을까
도무지 쓸데없는 것들에 관심이 많다고
우산을 쓴 친구들은 나에게 지적한다
이 거리 끝에는 커다란 전당포가 있다, 주인의 얼굴은 아무도 모른다, 사람들은 시간을 빌리러 뒤뚱뒤뚱 그곳에 간다
이름 없는 사람들이 죽고 다치기도 하고, 간판이 바뀌고 사건사고가 일어나기도 하는, 쓸데없는 일들이 우리의 일상이다. 그 일상은 비가 와서 옷이 조금 적는 것과 같은, 그리고 쉬 마르는 아무것도 아닌 일일 수 있다. 오히려 쓸데없는 일상에 관심가지는 일이 비난받을 일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내 일일 때에는 달라진다. 죽음이 내게 왔을 때는 전당포에 내 귀중한 것을 맡겨서라도 시간을 벌고 싶을 것이다.
한 소년이 죽기도 하지만 그러나 식물들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없다는 건 일상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경종을 울린다. 나의 일이 아닌 것은 쓸데없는, 식물 정도의, 간판을 바꾸는 정도의 가벼운 일이 된다. 우리의 생명이 이리 가벼워도 되는 걸까?
< 질투는 나의 힘 >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 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시인의 생을 보는 듯하다.
가난한 시절, 고생하는 가족들에게 힘이 되려고 뭐든 잘해보려고 애쓰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좀 더 잘해보려는 그 마음이 우리를 달리고 노력하게 만드는 힘이었고, 우리나라의 성장 동력이었다.
남보다 좀 더 잘해보려고 경쟁하며 노력했지만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는 이도 없고, 자신이 미약해 보여 탄식하는 젊은 청춘들, 미친 듯이 사랑도 찾고 스스로도 사랑하면서 생이 다하는 날까지 질기게 살 일이다.
< 입 속의 검은 잎 >
택시 운전사는 어두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이따금 고함을 친다, 그때마다 새들이 날아간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나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그를 생각한다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다
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문을 열면 벌판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그해 여름 땅바닥은 책과 검은 잎들을 질질 끌고 다녔다
접힌 옷가지를 펼칠 때마다 흰 연기가 튀어나왔다
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고 그는 썼다
나는 그의 얼굴을 한 번 본 적이 있다
신문에서였는데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이 터졌다, 얼마 후 그가 죽었다
그의 장례식은 거센 비바람으로 온통 번들거렸다
죽은 그를 실은 차는 참을 수 없이 느릿느릿 나아갔다
사람들은 장례식 행렬에 악착같이 매달렸고
백색의 차량 가들 검은 잎들은 나부꼈다
나의 혀는 천천히 굳어갔다, 그의 어린 아들은
잎들의 포위를 견디다 못해 울음을 터뜨렸다
그해 여름 많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없어졌고
놀란 자의 침묵 앞에 불쑥불쑥 나타났다
망자의 혀가 거리에 흘러넘쳤다
택시 운전사는 이따금 뒤를 돌아다본다
나는 저 운전사를 믿지 못한다, 공포에 질려
나는 더듬거린다, 그는 죽은 사람이다.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장례식들이 숨죽여야 했던가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내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
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면 안된다, 어디서
그 일이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어디든지
가까운 지방으로 나는 가야 하는 것이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 병 >
내 얼굴이 한 폭 낯선 풍경화로 보이기
시작한 이후, 나는 주어를 잃고 헤매이는
가지 잘린 늙은 나무가 되었다.
가끔씩 숨이 턱턱 막히는 어둠에 체해
반 토막 영혼을 뒤틀어 눈을 뜨면
잔인하게 죽어간 붉은 세월이 곱게 접혀 있는
단단한 몸통 위에,
사람아, 사람아 단풍 든다.
아아, 노랗게 단풍 든다.
기형도 시인의 가족사 등 생애를 검색한 후 읽으니 시인의 시들이 천천히 다가왔다. 정의를 위해 싸우고 싶지만 지난한 현실이 시인을 붙잡았을 것이다. 기형도 시인의 다른 글들도 찾아 읽고 싶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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