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읽으며/시. 소설. 수필.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신형철 산문)

by 프리정아 2024. 1. 16.

 

건축학을 잘 모르면서도 글짓기는 집 짓기와 유사한 것이라 믿고 있다. 지면(紙面)이 곧 지면(地面)이어서, 나는 거기에 집을 짓는다. 건축을 위한 공정 혹은 준칙은 다음과 같다.

인식을 생산해낼 것. 있을 만하고 또 있어야만 하는 건물이 지어져야 한다.

정확한 문장을 찾을 것, 건축에 적합한 자재를 찾듯이, 문장은 쓰는 것이 아니라 찾는 것이다.

공학적으로 배치할 것. 필요한 단락의 개수를 계산하고 각 단락에 들어가야 할 내용을 배분한다.

이 셋을 떠받치고 아우르는 더 중요한 원칙은 좋은 글을 얻고 싶다면 이쪽에서도 가치 있는 것을 줘야 한다는 것. 글쓰기에 시간을 주는 것.

여기 묶은 글들은 내 8년 동안의 생명 중 일부를 주고 바꾼 것들이다. 그러니까 이것들을 쓰면서 나는 죽어왔다. 그러나 이 글들은 지금 나에게 충분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문학평론가인 글쓴이의 머리말을 읽으니 생명과 바꾼 글이라니 한 문장도 쉽게 읽어서는 안될 비장함이 있었다. 글쓴이의 생각과 또 이를 뒷받침해주는 책을 연관 지어 쓴 글 중 마음에 와닿은 내용을 정리해 본다. 소개된 많은 책 목록을 적어두었다가 욕심껏 읽어보고 싶다. 

 

1. 어떤 책이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으려면 그 작품이 그 누군가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담고 있어야 한다는 것. 위로받는다는 것은 이해받는다는 것이고, 이해란 곧 정확한 인식과 다른 것이 아니므로, 위로란 곧 인식이며 인식이 곧 위로다. 정확히 인식한 책만 정확히 위로할 수 있다. <슬픔의 위안, 김명숙 옮김, 현암사, 2012>

 

2. 헤르타 뮐러의 장편소설 숨그네는 예상을 뛰어넘는다. 2009년 그가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지명되었다. 시의 압축성과 산문의 진솔함으로 추방된 이들의 풍경을 그려냈다고 스웨덴 한림원은 평했다.

19451, 당시 소련 치하 루마니아에 거주하는 독일인들은 소련 재건을 위해 수용소로 끌려가야 했다. 참전 경험이라곤 전혀 없는 우리가 러시아인들에게는 히틀러가 저지른 범죄에 책임이 있는 독일인들이었다. 그중 하나인 17살 소년 레오의 눈으로 이야기는 전개된다 견딜 수 없는 참혹을 견뎌내야 했다. 그래서 이 소년은 살인적인 배고픔을 배고픈 천사와 친구가 된 것으로, 숨조차 쉴 수 없는 착란 상태를 가슴속의 숨그네가 뛰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숨그네, 헤르타 뮐러, 문학동네, 2010>

 

3. 한 작가에 대해 신속 정확하게 알고 싶으면 일단 세 권의 책을 읽으면 된다. 데뷔작, 대표작, 히트작. 데뷔작에는 한 작가의 문학적 유전자가 고스란히 들어 있기 때문에, 대표작에서는 그 작가의 역량의 최대치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히트작은 그가 독자들과 형성한 공감대의 종류를 알려주기 때문에 읽을 가치가 있다. 노벨수상자 르 클레지오의 경우라면, 데뷔작인 조서’, 대표작으로 간주되는 사막’, 베스트셀러 황금 물고기를 우선 갖춰놓는 식으로 말이다.

 

4. 우리는 고독이 밀려왔다라는 표현을 흔히 사용하지만, 고독이 어쩌다가 밀려오는 것이 아니라 늘 그 자리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고독이 가끔 밀려오는 것이 아니고 고독하지 않다는 착각의 시간들이 가끔 밀려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텅 빈 푸른 방에 제아무리 살림살이를 들여놔도 그 방의 빈틈을 완전히 채울 수는 없으리라.

<무라카미 하루키, 렉싱턴의 유령, 열림원, 1997>

<심보선, 눈앞에 없는 사람, 문학과지성사, 2011>

 

5. 시인 김영승은 무소유보다 더 찬란한 극빈이라는 시집을 낸 적이 있다. 그는 심오하게 적나라하고 정교하게 제멋대로인 시를 쓴다. 그의 첫 시집은 반성이고 가장 최근 시집은 화창이다.

 

나는 이제

느릿느릿 걷고 힘이 세다

 

비 온 뒤

부드러운 폐곡선 보도블록에 떨어진 등꽃이

나를 올려다보게 한다 나는

등나무 페르골라 아래

벤치에 앉아 있다

자랑스러운 일이다

 

등꽃이 상하로

발을 쳤고

그 휘장에 가리워

나는

비로소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

 

미사일 날아갔던 봉재산엔

보리밭은 없어졌고

애기똥풀 군락지를 지나

롤러스케이트장 공원

계단 및 노인들 아지트는

멀리서 보면 경회루 같은데

내가 그 앞에 있다

 

명자꽃과 등꽃과

가로등 쌍 수은등은

그 향기를

바닥에 깐다

 

등꽃은

바닥에서부터 지붕까지

수직으로 이어져

꼿꼿한 것이다.

 

허공의 등나무 덩굴이

반달을 휘감는다

 

급한 일?

그런 게 어딨냐

<흐린 날 미사일> 전문. 김영승, 나남출판, 2013

 

6. 어떤 비평가가 되길 원하는가?

정확하게 칭찬하는 비평가.

정확하게 말한다는 것, 정확한 문장을 쓴다는 것, 나도 그런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은 있다. 그러나 정확하게 사랑하고 또 정확하게 죽는 일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러나 이 시 <장승리, 말> 덕분에 그럴 수 있게 되었다.

 

7. 노벨라(중편소설) 베스트 6

좋은 작품은 내게 와서 내가 결코 되찾을 수 없을 것을 앗아가거나 끝내 돌려줄 수 없을 것을 놓고 간다. 책 읽기란 그런 것이다. 세 개의 기준을 정하여 몇 권을 골라본다.

소설일 것, 시적일 것, 짧을 것. 이 기준에 부합하는 작품으로 이 소설들은 거의 완전무결한 축복이다. 소설을 써야 한다면, 이렇게 쓰고 싶다.

- 마루야마 겐지, 달에 울다, 자음과 모음, 2015

  이 세상에는 불의 문장물의 문장이 있다. 마르크스의 헤겔 법철학 비판 서설과 마루야마 겐지의 달에 울다가 이에 해당한다. 전자를 읽으면 정신이 타고 후자를 읽으면 영혼이 젖는다. 무슨 말이 필요한가.

- 크리스토프 바타이유, 다다를 수 없는 나라, 문학동네, 2006

  내 눈으로 읽고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소설이다.

- 아고타 크리스토프, 어제, 문학동네, 2007

  삶에 난자당하며 겨우 성장하는 불행한 아이들이 제아무리 칼을 휘둘러도 삶은 베어 지지 않는다는 것. 이 작가는 예상치 못한 순간에, 최소한의 문장으로, 가장 강렬한 감정을 창조하여 독자를 베어버린다.

- 배수아, 철수, 작가정신, 1998

  1988년이 배경인 이 독한 계급적 연애소설철수라는 이름을 제목으로 얹을 사람이 또 있을까. 그녀의 소설에는 상투적으로 자연스러운 문장이 거의 없다.

- 파스칼 키냐르, 로마의 테라스, 문학과지성사, 2002

  이 작가의 다른 장점들이 더 많이 칭송되고 있지만 그는 멋진 이야기를 만들어낼 줄 아는 작가이기도 하다.

-황정은, 백의 그림자, 민음사, 2010

  지은이가 해설을 쓴 책으로 글의 제목이 백의 그림자에 붙이는 다섯 개의 주석으로 이 소설에 해설을 쓰는 것조차 조심스러워진다.

 

8. 작가의 인생책 베스트 5

- 릴케, 두이노의 비가, 열린책들, 2014

- 손턴 와일더,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 샘터, 2010

- 시바타 쇼, 그래도 우리의 나날, 문학동네, 2018

- 존 윌리엄스, 스토너, 알에이치코리아, 2015

- 휴버트 드레이퍼스숀 도런스 켈리, 모든 것은 빛난다. 사월의 책,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