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지성 시인선 13 이성복 시집
문학과 지성 시인선 13번째 시집으로 이성복 시인의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 시집을 읽었다.
여러 책들을 통해 이성복 시인의 시가 소개된 글이 많았다.
소개말에 ‘시인은 개인적 삶을 통해서 얻은 고통스러운 진단을 우리의 보편적인 삶의 양식으로 확대하면서 우리를 끈질기게 그리고 원초적으로 괴롭히는 병든 상태와 치열한 싸움을 벌여왔다.’고 적었다. 사실 시인의 시를 읽으며 어려워 이해가 안 되는 경우가 많았다. 되도록 내 느낌대로 받아들이고 싶었지만 시평 등도 참고하며 시인의 마음에 다가가 보려 애썼다.
몇 편의 시를 옮겨 적어 본다.
< 1959년 >
그해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시작되어도
봄은 오지 않았다 복숭아나무는
채 꽃 피기 전에 아주 작은 열매를 맺고
불임의 살구나무는 시들어 갔다
소년들의 성기에는 까닭없이 고름이 흐르고
의사들은 아프리카까지 이민을 떠났다. 우리는
유학 가는 친구들에게 술 한잔 얻어 먹거나
이차 대전 때 남양으로 징용 간 삼촌에게서
뜻밖의 편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놀라움도 우리를 무기력과 불감증으로부터
불러내지 못했고 다만, 그 전해에 비해
약간 더 화려하게 절망적인 우리의 습관을
수식했을 뿐 아무 것도 추억되지 않았다
어머니는 살아 있고 여동생은 발랄하지만
그들의 기쁨은 소리 없이 내 구둣발에 짓이겨지거나
이미 파리채 밑에 으깨어져 있었고
춘화를 볼 때마다 부패한 채 떠올라 왔다
그해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시작되어도
우리는 봄이 아닌 윤리와 사이비 학설과
싸우고 있었다 오지 않는 봄이어야 했기에
우리는 보이지 않는 감옥으로 자진해 갔다
< 물의 나라에서 >
1
물 속에 잠든 풀잎
한번 발 내리며
영원히 무너지는
물방울
작은 물이 큰 물
만나는 감격
잠깐 번지는
감격
흐르는 물과 내리는 물의
서로 몸 바꾸기
그대가 물의 발이라면 나는 물의 발가락
그대가 물의 종이라면 물의 분자와 분자 사이를
헤집고 밀치며 살 부비는 나는 물의 종소리
그대가 물의 입이라면 벌어진 물의 입이라면
나는 하늘에 땅을 잇는 물의 울음 오, 그대가 물의 일그러진 입이라면
2
풀잎 위에 구르는 물방울
풀줄기를 흔드는 물방울
풀밭을 흔드는 물방울
풀밭을 누르는 물방울
맨발로 지우면 맨발에
맺히는 물방울
눈 감으면 마음에
구르는 물방울
마음 기울면
흘러내리는 물방울
제 옆의 물방울에 어리는
다른 물방울의 얼굴
제 옆의 물방울에 걸리는
다른 물방울의 목소리
맨발로 지우면
날개 없는 방아깨비
뛰는 연습을 하고
맨발로 지우면
네 눈은 팍,
흩어져 흐르고
3
누가 물 위를 지나가면
물의 목소리
누가 풀잎 흔들면
풀빛 나음 흔들려
누가 거기 있어?
눈초리, 목마를 눈초리
누가 누구를 흔든다
......안개......
누가 나를 흔든다
풀잎 사이
물방울,
떠 있는
< 모래내·1978년 >
1
하늘 한 곳에서 어머니는 늘 아팠다
밤 이슥하도록 전화하고 깨자마자
누이는 또 전화했다. 혼인날이 멀지 않은 거다
눈 감으면 노란 꽃들이 머리 끝까지 흔들리고
시간은 모래 언덕처럼 흘러내렸다
아, 잤다 잠 속에서 다시 잤다
보았다, 달려드는. 눈 속으로, 트럭, 거대한
무서워요 어머니
-얘야, 나는 아프단다
2
어제는 먼지 앉은 기왓장에
하늘색을 칠하고
오늘 저녁 누이의 결혼 얘기를 듣는다
꿈 속인 듯 멀리 화곡동 불빛이
흔들린다 꿈 속인 듯 아득히 기적이 울고
웃음 소리에 놀란 그림자 벽에 춤춘다
노새야, 노새야 빨리 오렴
어린 날의 내가 스물 여덟 살의 나를 끌고 간다
산 넘고 물 건너 간다 노새야, 멀리 가야 해
3
거기서 너는 살았다 선량한 아버지와
볏짚단 같은 어머니, 티밥같이 웃는 누이와 함께
거기서 너는 살았다 기차 소리 목에 걸고
흔들리는 무우꽃 꺾어 깡통에 꽂고 오래 너는 살았다
더 살 수 없는 곳에 사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우연히 스치는 질문---새는 어떻게 집을 짓는가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풀잎도 잠을 자는가,
대답하지 못했지만 너는 거기 살았다 붉게 물들어
담벽을 타고 오르며 동네 아이들 노래 속에 가라앉으며
그리고 어느날 너는 집을 비워 줘야 했다 트럭이
오고 세간을 싣고 여러번 너는 뒤돌아 보아야 했다
< 세월에 대하여 >
1
석수의 삶은 돌을 깨뜨리고 채소 장수의 삶은
하루 종일 서 있다 몬티를 닮은 내 친구는
동시상영관에서 죽치더니 또 어디로 갔는지
세월은 갔고 세월은 갈 것이고 이천 년 되는 해
아침 너는 손자를 볼 것이다 그래 가야지
천국으로 통하는 차들은 바삐 지나가고
가로수는 줄을 잘 맞춘다 저기, 웬 아이가
쥐꼬리를 잡고 빙빙 돌리며 씽긋 웃는다
세월이여, 얼어붙은 날들이여
야근하고 돌아와 환한 날들을 잠자던 누이들이여
2
피로의 물줄기를 타넘다 보면 때로 이마에
뱀딸기꽃이 피어 오르고 그건 대부분
환영이었고 때로는 정말 형님이 아들을 낳기도
했다 아버지가 으흐허 웃었다 발가벗은
나무에서 또 몇 개의 열매가 떨어졌다 때로는
얼음 깔린 하늘 위로 붉은 말이 연탄을
끌고 갔다 그건 대부분 환영이었고 정말
허리 꺾인 아이들이 철 지난 고추나무처럼
언덕에 박혀 있기도 했다 정말 거세된
친구들이 유행가를 부르며 사라져 갔지만
세월은 흩날리지 않았다 세월은 신다 버린 구두
속에서 곤한 잠을 자다 들키기도 하고
때로는 총알 맞은 새처럼 거꾸로 떨어졌다
아버지는 흐흐허 웃고만 있었다 물줄기를
타넘다 보면 때로 나는 높은 새집 위에서
잠시 쉬기도 하였고 그건 대부분 환영이었다.
3
세월은 갔고 아무도 그 어둡고 깊은 노린내 나는
구멍으로부터 돌아오지 못했다 몇 번인가 되돌아온
편지 해답은 언제나 질문의 잔해였고 친구들은
태엽 풀린 비행기처럼 고꾸라지곤 했다 너무
피곤해 수음을 할 수 없을 때 어른거리던
하얀 풀뿌리 얼어붙은 웅덩이 세월은 갔고
매일매일 작부들은 노래 불렀다 스물 세 살,
스물 네 살 나이가 담뱃진에 노랗게 물들 때까지
또 나는 열 한 시만 되면 버스를 집어 탔고
세월은 갔다 봉제 공장 누이들이 밥 먹는 30분 동안
다리미는 세워졌고 어느 예식장에서나 30분마다
신랑 신부는 바뀌어 갔다 세월은 갔다 변색한
백일 사진 화교들이 공동묘지 싸구려 밥집 빗물
고인 길바닥, 나뭇잎에도 세월은 갔다 한 아이가
세발 자전거를 타고 번잡한 찻길을 가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불쌍했고 어떤 사람은 불쌍한
사람을 보고 울었다 아무 것도 그 비리고 어지러운
숨 막히는 구멍으로부터 돌아오지 못했다.
4
나는 세월이란 말만 들으면 가슴이 아프다
나는 곱게곱게 자라왔고 몇 개의 돌부리 같은
사건들을 제외하면 아무 일도 없었다 중학교
고등학교 그 어려운 수업시대, 욕정과 영웅심과
부끄러움도 쉽게 풍화했다 잊어버릴 것도 없는데
세월은 안개처럼, 취기처럼 올라온다
웬 들 판 이 이 렇 게 넓 어 지 고
얼마나빨간작은꽃들이지평선끝까지아물거리는가
그해
자주 눈이 내리고
빨리 흙탕물로 변해 갔다
나는 밤이었다 나는 너와 함께
기차를 타고 민둥산을 지나가고 있
었다 이따금 기차가 멎으면 하얀 물체가
어른거렸고 또 기차는 떠났다...... 세월은 갔다
어쩌면 이런 일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돌아서
출령거리는
어둠 속으로 빠져 들어갈 때
너는 발을 동동 구르며
부서지기 시작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너를 사랑했다
나는 네가 잠자는 두 평 방이었다
인형 몇 개가 같은 표정으로 앉아있고
액자 속의 교회에서는 종소리가 들리는......
나는 너의 방이었다
네가 바라보는 풀밭이었다
풀밭 옆으로 숨죽여 흐르는 냇물이었다
그리고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문득 고개를 떨군 네
마음 같은,
한줌
공기였다)
세월이라는 말이 어딘가에서 나를 발견할 때마다
하늘이 눈더미처럼 내려앉고 전깃줄 같은 것이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을 본다 남들처럼
나도 두어 번 연애에 실패했고 그저 실패했을
뿐, 그때마다 유행가가 얼마만큼 절실한지
알았고 노는 사람이나 놀리는 사람이나 그리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 세월은
언제나 나보다 앞서 갔고 나는 또 몇 번씩
그 비좁고 습기찬 문간을 지나가야 했다.
대개 78년,79년에 쓴 시들을 묶었다고 한다.
봄이 오기를 기다리며 힘들게, 치열하게 산 이 땅의 시민들, 청춘들의 모습이 겹쳐진다.
굳이 나의 생각을 적는 것이 어쩌면 시를 난도질하는 것일 수 있을 것 같아 조심스럽다.
변명일 수도 있고.
나는 입을 닫고 읽는 이에게 다가오는 대로 두는 것이 시인에 대한 예의일지 모른다.
이성복 시인의 시집으로
남해 금산
그 여름의 끝
호랑가시나무의 기억
정든 유곽에서
아, 입이 없는 것들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
래여애반다라 등이 있다고 하니 이성복 시인의 시를 읽어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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