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동네시인선 185 장옥관 시집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를 읽었다.
그 사람은 어디로 갔을까? 고독사한 사람에 대한 불쌍함이 아니라 내게 또 다른 시각을 준 시인의 시에 꽃을 바치면서 시 몇 편을 옮겨 적어 본다.
< 무릎 >
1.
새도 무릎이 있던가 뼈와 뼈 사이에 둥근 언덕이 박혀 있다 무릎을 꺾으니 계단이 되었다 꿇는 줄도 모르고 무릎을 꿇은 일 적지 않았으리라
2.
달콤한 샘에 입 대기 위해 나비는 무릎을 꿇는다. 무릎을 접지 않고 어찌 문이 열리랴 금동부처의 사타구니 사이로 머리 내미는 검은 달
3.
사람이 사람의 무릎 꿇리는 건 나쁜 일이다.
4.
무릎이 다 닳아 새가 된 사람을 너는 안다 쌀자루를 이고 다니다 무릎이 다 녹은 것이다 나비처럼 너는 언덕을 넘고 싶다 검은 달을 향해 컹컹, 너는 짖어본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원치 않게 무릎 꿇으며 사는 이 땅의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이 보인다. 무거운 쌀가마니나 나뭇짐을 지고, 심지어는 냄새나는 똥장군을 지고 식구들의 먹을 것과 땔감을 책임지던 아버지, 돈 안되는 무거운 푸성귀를 먼 시장까지 이고 가서 푼돈이나마 벌어오려던 어머니 모습이 겹쳐 온다. 무거운 짐 때문에 한걸음 옮기는 것이 산을 옮기듯 힘들어도 버릴 수 없는 짐. 가벼이 벗어버리고 나비처럼 가볍게 걷고 싶지만 목구멍까지 차 오른 생의 무게를 달을 보며 혼자 삭였으리라.
사람이 사람의 무릎 꿇리는 건 나쁜 일이다. 힘있는 자가 함부로 약자에게 무릎 꿇게 하는 일이 없는 세상이 오길 바란다.
< 유적지 >
나무는 배고프지 않나 사람은 한 끼라도 거르면 온몸에 불을 켜는데 나무는 무엇으로 허기를 견디나 허기 때문에 꽃은 피고 이파리 무성해지는데 구멍처럼 구름처럼 건드리면 더 커지는 허기는 내 팔뚝에도 새겨져 있는데
열 살 무렵, 간장독처럼 덩치 컸지만 잦은 매질 탓에 늘 순하기만 했던 그 개, 취할 때마다 터지던 제 주인의 광기를 몸으로 받아내던 그 개가, 어느 날 마당 구석에서 비스킷을 먹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밟은 경계, 검은 구름 풀썩 피어오르더니 내 몸을 덮쳤다
그날 밤 죽도록 얻어맞았다 광목 생지(生紙) 찢듯 이어지던 긴긴 겨울밤 손이 귀한 집안의 장손을 물어뜯은 죗값을 몽둥이로 고스란히 치러냈다 하지만 끝내 변명해주지 못했으니 솜이불 보따리처럼 웅크려 어린 발길질에도 눈만 끔뻑이던 그 개가, 왜 미쳐 날뛰었는지
들여다봐서는 안 되는 동굴, 닿을 수 없는 깊이를 왜 나는 들여다보았는지 이윽고 날은 밝고, 피딱지 말라붙은 몽둥이 던져놓은 개나리 울타리 아래 그 개는, 찌그러든 양은그릇을 말갛게 핥아댔다 폭풍이 지나간 눈동자는 유난히 희고 맑았다
그 개는, 이미 오래전에 이 지상에서 사라졌으리라 사라지면서 남겨놓은 허기에 개나리는 지천으로 피어 노랗게 흔들리고 먹구름 가득 담았던 하늘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시침 뚝 떼고 허기 가신 얼굴로 말갛게 비어 있는데
내가 자초한 잘못으로 뭇매를 맞은 개, 그러나 한 마디도 못하고 배고픔과 아픔을 고스란히 견딜 수밖에 없는 개를 보니 우리 역사 속의 힘없는 민초들이 겹쳐 온다. 내 자식만 귀하고 내가 지키려는 이념, 또는 나의 밥줄 때문에 개의 생명이나 배고픔은 안중에도 없다.
나는 그런 적은 없었는가 돌아보게 된다. 제주를 걸어보니 그들이 겪은 무수한 아픔들이 다가와서 이 시와 겹쳐진다.
< 숫돌 >
핏물 번진 살점 헤집으며
날뛰던 칼을
몇 방울 물로 고요히 잠재우는 숫돌
서슬 퍼런 칼날에
제 몸 선선히 내어주는 숫돌
쭈그려 칼날 벼리다보면
이제껏 온전히 날 내어준 적 없었구나
사랑이든 혁명이든
마땅히 밀어붙여야 할 뜨거운 순간에
슬며시 몸 빼 혼자 쏟은 일
어디 한두 번인가
계류의 모난 돌멩이 오래 씹어
모래알로 게워내는
하류의 강물은 아닐지라도
내 속의 숫돌 너무 거칠어 불꽃만 일으키고
이순이 되도록 시를 써도
숫돌은 다듬어지지 않네
이 거친 숫돌로 무엇을 벼릴까
틈만 나면 피어오르는 검은 구름 끝내
주저앉힐 수도 없으면서
시어 하나를 헤집고 다듬으며 잠재우기도 하고, 뜨겁고 거칠게 피어오르는 말을 벼고 벼리는 시인의 모습이 그대로 시에 나타난다.
어릴 적 아버지께서 낫이나 칼을 갈 때 숫돌에 물을 떨어뜨려 가는 모습을 보았다. 성급하게 갈지 않고 지긋이 오래 각도를 줄여서 갈아야 오래 날 선 연장이 된다.
날선 문장, 검은 구름마저 벨 수 있는 글은 어떤 글일까? 숫돌이 닳듯이 내 속의 다듬어지지 않은 생각들, 몽매한 것, 무례를 다듬어가며 온전히 나를 내어주는 일이 필요하다.
< 없는 사람 >
오피스텔 문을 따고 들어가니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없는 게 아니라 꽉 채우고 있었다고 한다 그가
화장실과 거실을 메우고 복도와 엘리베이터와
이웃집 문틈으로 스며든 이유가
외로움 때문이라 예단해선 안 된다
단지 그는 갑갑했을 뿐이다
갑갑함이 저 스스로 몸 부풀려 이웃집 현관문을 노크한 것일 게다
경계를 벗어나 공기를 장악한 그는 원래부터
바람이었다
오십이 넘도록 할리데이비슨을 타고 다니며
공간을 확장하고 저를 부풀렸다
미처 따라가지 못한 뼈는
화장실 문턱에 가지런히 누워 스멀스멀 구더기를 불러들였다
날개를 달아주기 위해서였다
견디다못해 이웃들이 문 따고 들어가니
낡은 소파 밑에서 그가 키우던 포메라니안이
꼬리 흔들며 기어나왔다고 한다
도대체 무얼 먹었는지 통통하게 살이 오른 개는
묵비권을 행사했다고 한다
제가 본 것들을 끝내 다 말하지 않은 영특한 개였다
세를 준 주인이 서둘러 개를 안고 나가도 그는 따라나서지 않았다
이미 집의 일부가 된 것이다
벽지와 바닥은 물론 콘크리트 뼈대만 남기고 뜯어내도 그는
결코 그 오피스텔을 떠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진상은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다
소문을 막은 거라 속단해선 안 된다
사려 깊은 이웃들이 선택한 최선의 의례이기 때문이다
결코 그는
없는 사람이 아니다
이웃의 비강에,
공중에 새겨져 불멸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를 읽으니 이전에 올린 시인의 시 <고등어가 돌아다닌다>가> 겹쳐 온다.
내 코는 고등어를 따라
모든 부재를 만난다
부재가 죽음 속에서 머물고픈 모양이다
고등어 냄새가 죽어서 더 이상 이곳에 없는 다른 수많은 존재들을 불러왔다. 부재하지만 냄새로라도 머물고픈 소극적인 어떤 존재들에 대한 시였다.
이 시는 오십이 넘도록 할리데이비슨을 타며 소위 멋지게 사신 분이 죽어서도 적극적으로 이웃을 방문하고 이웃의 비강에 자신을 새겨 불멸이 된 이야기다. 구더기를 불러 구더기에게 날개를 달아주고, 이웃집을 노크하고 복도와 엘리베이터까지 영역을 확대한다. 죽어서 그냥 누워있지 않고 열일을 하며 시공간을 넘나드는 슈퍼맨이 된 이야기다. 놀랍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이 사라지기 때문이 아닐까? 육체가 사라지면 남는 것은? 시인의 시에서 냄새에 대한 시가 유독 많고, 또 그 시각이 독특하고 놀랍다. 죽어서 어떤 모습으로든 영역을 만들고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죽음을 달리 보게 한다.
< 내 아름다운 녹 >
녹을 온몸에 받아들이는 종을 보았다
암세포 서서히 번지는 제 몸 지켜보는 환자처럼
녹은 아름다웠다
움켜쥐면 바스락 흩어지는 버즘나무 가을은 저 홀로 깊이 물들었다
나는 지금 녹물 든 사람
링거 수액 스며드는 혈관 속 무수한 계절은 피어나고
거품처럼 파꽃이 피고
박새가 부리 비비는 산수유 가지에 노란 부스럼이 돋아나고
두꺼운 커튼 드리운 병실 바깥의 고궁
처마에 매달린 덩그렁 당그랑
쉰 목소리
파르라니 실핏줄 돋은 어스름 속으로
누가 애 터지게 누군갈 부르나니, 그 종소리
녹슨 종, 낙엽, 병든 몸…….
언젠가 누구에게나 다가 올, 생명이 있는 것이나 없는 것이나 겪을 일을 어떻게 바라보고 맞이해야 할지 생각해보게 한다.
시를 읽는 동안 장옥관 시인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사유하는 시간이어서 좋았다. 문학동네시인선의 다른 시들도 찾아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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