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시선 435 고영민 시집 봄의 정치’를 읽었다. ‘똥구멍으로 시를 읽다’라는 기발한 시에 반해서 시인의 시집을 찾아 읽게 되었다.
< 적막 >
매년 오던 꽃이 올해는 오지 않는다
꽃 없는 군자란의
봄이란
잎새 사이를 내려다본다
꽃대가 올라왔을
멀고도 아득한 길
어찌 봄이 꽃으로만 오랴마는
꽃을 놓친
너의 마음이란
봄 오는 일이
결국은 꽃 한송이 머리에 이고 와
한 열흘 누군가 앞에
말없이 서 있다 가는 것임을
뿌리로부터
흙과 물로부터 오다가
끝내 발길을 돌려
왔던 길 되짚어갔을
꽃의 긴 그림자
이 시를 읽으니 꽃처럼 내 앞에 나타나준 자식들이 새삼 고마워진다.
늘 봄이 되면 꽃이 피지만 봄이 되어도 피지 않는 꽃이 있다. 늘 내 곁에 있을 것 같았던 사랑하는 이가 더 이상 오지 않으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나도 아름다운 봄 풍경을 볼 때 내가 중병에 걸려 내년이면 이 꽃을 볼 수 없다면 어떤 마음일지 생각할 때가 있다. 이 아름다움이 더한 처절함으로 다가오지 않을까? 꽃처럼 살다간 내 혈육들, 친구들, 대의를 위해 목숨을 내건 이들의 긴 그림자를 내 그림자 위에 겹쳐 본다. 가버린 혈육에 대한 다음 시도 가슴을 찡 울린다.
< 철심 >
유골을 받으러
식구들은 수골실로 모였다
철심이 있는데
어떻게 할까요?
분쇄사가 물었다
오빠 어릴 때 경운기에서 떨어져
다리 수술했잖아, 엄마
엄마 또 운다
영영 타지 않고 남는 게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
분쇄사는 천천히
철심을 골라냈다
한낱 뼈 한 줌으로 돌아온 자식, 그것만으로도 천길 땅속으로 빠질 텐데 죽어서도 뼈에 박혀있는 철심은 부모 가슴에 영원히 남을 상처이리라. 인생이 그러하니 가고 보내는 마음의 연습도 필요한 때이지만 머리로 이해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 시인 앞 >
꽃은 시인 앞에 와서 핀다
꿀벌은 시인 앞에 와서 날갯짓한다
잎새는 시인 앞에 와서 지고
군인은 시인 앞에 와서 담배를 꺼내 문다
흰 고양이는 죽는다
시인 앞에 와서
연인들은 시인 앞에 와서 입을 맞춘다
아이들은 시인 앞에 와서 뛰놀며
노인은 시인 앞에 와서 운다
누가 누구를 버린 걸까
무게를 못 견딘 나뭇가지처럼
누운 풀과 검은 돌들
긴 해바라기 꽃밭
꽃이 피어도 시인이 보아야 비로소 보이고, 잎새가 지는 것도 시인의 가슴이어야 안다. 작은 움직임, 하찮은 것들, 환영받지 못하는 것들도 시인의 마음을 통과하면 살아나고 뛰놀고 의미가 부여된다. 시어가 날뛰고 꽃피고 숨쉬게 하자. 시인이 시를 쓰지 않고 글쓰는 이가 글을 쓰지 않으면 나무는 꺾이고 꽃은 피지 않을 것이다. 영상의 시대에 더 이상 시를 읽지 않고, 책을 읽지 않으면 생명력 없는 풀밭, 꽃이 없어 열매맺지 않는 과수원이 되지는 않을지 걱정을 해본다.
< 저녁으로 >
누가 올 것만 같다
어두워져가는 저 길 끝
누가 올 것만 같다
조금만 기다리면
조금, 조금만 더 기다리면
일어설 수 없다
가버리면 영영 후회할 누가 올 것만 같다
청미래덩굴 너머
길은 조금씩 지워지고
뭉개지고
그래도 여전히 누군가는 오고
손짓하고
소리치고
지워지고 있다
기다리는 내가 지워지고 있다
누가 올 것만 같아 기다린 내가
만질 수도 안을 수도 없게
지워지고 있다
하지만 기다리고 있다
누가 올 것만 같아
시를 읽다가 책의 제일 뒤 쪽에 있는 시인의 말을 읽으니 이 시에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가 없었다. 시인의 말을 읽으니 밥 한 끼 준비하는 것을 힘들어하는 내가 많이 부끄러워졌다.
- 시인의 말 -
시집을 묶는 동안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고향에서 사과 농사를 짓던 서른셋 형이 사고로 세상을 떴을 때
어머니는 매일 저녁 아들이 지냈던 방에 불을 밝혀놓았다.
2년 넘게 단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아버지가 병에 걸려 몸져누웠을 때
어머니는 매끼 새 밥을 지어 올렸다.
채 몇숟가락 뜨지 못해 밥이 그대로 남아 있어도
어머니는 병든 남편을 위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삼시 세끼 새 밥을 지어 올렸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중에 죄가 되고 한이 된다고 했다.
나도 시를 이렇게 써야 한다.
.......... 2019년 7월 고영민
< 흰 토끼 일곱마리는 >
청보리밭을 보면
나는 왜 흰 토끼 일곱 마리가 떠오를까
우리 밭의 보리 싹을
누가 뭉텅뭉텅 낫으로 베어가고
아버지가 그 집을 찾아가
어린 토끼를 한 마리씩 우리에서 꺼내
귀때기를 잡고
마당 한가운데 힘껏
내동댕이치는데
토끼가 먹었으니 토끼를 죽여야지!
어린 토끼는 땅을 맞고
바르르 떨다가 죽고
죽고
죽고
또 죽고
어스름 녘 일곱 마리 토끼가 죽어 있는
그 집 마당
그 집 식구들
아버지가 내 손을 잡아끌며 큰 소리로
집에 가자!
토끼가 먹었으니 토끼를 죽인겨!
싹둑 베어진 청보리밭을 지날 때쯤
뒤돌아보았던
그 집 마당의 작고 어린
흰 토끼 일곱마리는
식구들 입에 들어갈 보리가 베어진 상황에서 가족의 밥줄을 지키려는 아버지의 우악스런 모습과 기어이 아들 손을 잡고 가서 강한 아들로 교육시키려는 아버지의 속뜻도 보인다. 그러나 어린 토끼가 죽어가는 그 모습 때문에 자꾸만 뒤돌아보던, 토끼처럼 작고 떨리는 어린아이의 모습이 비친다. 그래서 시인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우리는 무언가를 지킨다는 명분 때문에 힘없는 것을 마구 죽이는 일은 없었는지, 목표 달성이라는 거창한 구호를 내걸고 내 기준에서 위력을 휘두르지는 않았는지 돌아보게 된다. 내가 직에 있으면서 수업 목표 달성이라는 구호 아래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말이나 행동들이 떠오른다. 나로 인해 가슴 떨렸을 많은 작은 생명들에게 용서를 빈다.
< 봄의 정치 >
봄이 오는 걸 보면
세상이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봄이 온다는 것만으로 세상이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밤은 짧아지고 낮은 길어졌다
얼음이 풀린다
나는 몸을 움츠리지 않고
떨지도 않고 걷는다
자꾸 밖으로 나가고 싶은 것만으로도
세상이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몸을 지나가도 상처가 되지 않는 바람
따뜻한 눈송이들
지난겨울의 노인들은 살아남아
하늘을 올려다본다
단단히 감고 있는 꽃눈을
조금씩 떠보는 나무들의 눈시울
찬 시냇물에 거듭 입을 맞추는 고라니
나의 딸들은
새 학기를 맞았다
고영민 시인의 시를 더 많이 옮겨 적고 싶지만 ‘창비시선 435 고영민 시집 봄의 정치’를 읽어 더 많은 시인의 시를 접하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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