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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며/시. 소설. 수필.

고영민 시집 구구(문학동네 시인선 073 )

by 프리정아 2024. 3. 23.

 

문학동네시인선 073 고영민 시인의 시집 구구를 읽었다. 안도현 시인이 쓴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는 책을 읽다가 고영민 시인이 쓴 똥구멍으로 시를 읽다라는 기발한 시에 반해서 시인의 시집을 읽게 되었다. 이 시가 든 악어라는 시집을 구하지 못하여 다른 시집을 구해왔다. 우선 이 시집에는 없지만 재미있었던 고영민 시인의 시를 적어본다.

 

< 똥구멍으로 시를 읽다 >

겨울산을 오르다 갑자기 똥이 마려워

배낭 속 휴지를 찾으니 없다

휴지가 될 만한 종이라곤

들고 온 신작 시집 한권이 전부

다른 계절 같으면 잎새가 지천의 휴지이련만

그런 궁여지책도 이 계절의 산은

허락지 않는다

할 수 없이 들려온 시집의 낱장을

무례하게도 찢는다

무릎까지 바지를 내리고 산중턱에 걸터 앉아

그 분의 시를 정성껏 읽는다

읽은 시를 천천히 손아귀로 구긴다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이 낱장의 종이가 한 시인을 버리고

한 권의 시집을 버리고, 자신이 시였음을 버리고

머물던 자신의 페이지마저 버려

온전히 한 장 휴지일 때까지

무참히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펼쳐 보니 나를 훑고 지나가도 아프지 않을 만큼

결이 부들부들해져 있었다

한 장 종이가 내 밑을 천천히 지나간다

, 부드럽게 읽힌다

다시 반으로 접어 읽고,

또다시 반으로 접어 읽는다

 

이 시의 제목 똥구멍으로 시를 읽다는 얼마나 해학적이면서도 충격적인지. 눈이 아닌 똥구멍으로 시를 읽다니, 제목부터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시를 읽으면서 웃음이 나오고 그러나 맘껏 웃으면 안 될 것 같은 시인의 상황이 그려지지만 또 다시 웃게 된다. 등산을 다니는 나는 많이 느껴본 상황이라서.

똥은 이미 누었는데 휴지는 없다. 이런 상황에서 혈액형 별 행동유형이 재미로 나올 법도 하지만 시인이 가진 유일한 선택은 가지고 있는 신작 시집뿐이다.. 그러나 불경스럽게, 더구나 본인이 시인으로서 그 시들이 어떻게 쓴 시인지 알기에 감히 시집을 찢기에는 가슴이 아프고 죄스럽다. 그것도 똥을 닦기 위해서 찢는 것은 본인에게도 하느님 앞에서도 용서가 안 되는 상황이다.

할 수 없이 들려온 시집의 낱장을

무례하게도 찢는다

어쩔 수 없이 무례를 저지를 수밖에 없지만, 그리고 바지를 내리고 냄새나는 상황이지만 종교의식을 집행하듯 죄 사함의 의식을 거행한다.

그 분의 시를 정성껏 읽는다.

바지를 내리고 시를 읽고 있는 시인, 그리고 종이를 구기고, 또 구기고 있는 시인의 모습은 웃음을 넘어 오히려 눈물이 날 것 같다. 구기고, 구기고 또 구겨서 그것이 더 이상 시가 아니고 휴지가 될 때까지, 도저히 시인의 시로 똥을 닦을 수 없는 시인의 안타까운 참선이 끝난 후 그 종이는 휴지로 승화하여 시인의 뒤를 닦는 경지에 이른다. 더불어 시인은 눈이 아닌 똥구멍으로도 시를 읽는 득도의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차마 두 장, 세 장을 찢을 수 없어 한 장으로 접고, 또 접어 뒤를 닦는 시인의 소심함도 엿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소심함이 아니라 시를 써 본 사람만이 한 편의 시가 어떻게 나왔는지 알기에, 성경이나 불경을 대하듯 시집을 대하는 모습과 같으리라.

 

시가 실린 시집 악어를 구해서 읽어보기로 마음을 먹고 여기서는 구구시집의 시를 적어본다.

 

< 식물 >

 코에 호스를 꽂은 채 누워 있는 사내는 자신을 반쯤 화분에 묻어놓았다 자꾸 잔뿌리가 돋는다 노모는 안타까운 듯 사내의 몸을 굴린다 구근처럼 누워 있는 사내는 왜 식물을 선택했을까 코에 연결된 긴 물관으로 음식물이 들어간다 이 봄이 지나면 저를 그냥 깊이 묻어주세요 사내는 소리쳤으나 노모는 알아듣지 못한다 뉴스를 보니 어떤 씨앗이 700년 만에 깨어났다는구나 노모는 혼자 중얼거리며 길어진 사내의 손톱과 발톱을 깎아준다 전기면도기로 사내의 얼굴을 조심스레 흔들어본다 몇 날 며칠 병실 안을 넘겨다보던 목련이 진다 멀리 천변의 벚꽃도 진다 올봄 사내의 몸속으론 어떤 꽃이 와서 피었다 갔을까 병실 안으로 들어온 봄볕에 눈꺼풀이 무거워진 노모가 침상에 기댄 채 700년 된 씨앗처럼 꾸벅꾸벅 졸고 있다

 

코에 호스를 꽂은 채 누워 있는 사내와 그 아들을 간호하는 노모의 안타까운 정경이 그려진다. 노모가 안타까운 자식은 소리 없이 말로 자신의 뜻을 전하지만 노모는 어떤 씨앗이 700년 만에 깨어났다는 뉴스를 보며 아직도 희망을 잃지 않는다. 자식의 얼굴을 다듬어주고 손톱과 발톱을 깎아준다. 봄이 가고 아무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절망밖에 없을 것 같은 병실에도 봄이 왔을 것이고, 사내의 몸속에도 꽃이 피었다가 갔을 것이다. 시를 다 읽고 나니 절망 너머 희망의 기운이 감도는 따스한 병실 풍경이 그려진다.

 

< 구구 >

 

비둘기가 울 때마다 비둘기가 생겨난다

 

비둘기는 아주 오래된 동네

텅 빈 동네

 

학교를 빠져나와 공중화장실에서

긴 복대를 풀어놓고

숨죽인 채 쌍둥이 사내애를 낳고 있는

여고생

빈 유모차를 밀며 공중화장실 옆을 지나는

할머니 머리 위

 

비둘기는 비둘기를 참을 수 없다

밀려오는 요의(尿意)처럼

누군가는 비둘기를 속속들이 알고 있다

 

비둘기가 비둘기에게 물을 붓는다

비둘기는 꺼질 리가 없다

 

가질 수도 버릴 수도 없는 비둘기가 연신

비둘기를 뱉어낸다

 

화장실에서 아이를 낳은 여고생의 뉴스를 듣고 아마 시인은 이 시를 썼을 것 같다. 학교를 빠져나와 빈 동네 공중화장실에서 아이를 낳을 수밖에 없는 여고생과 비둘기의 울음, 그리고 유모차를 밀고 지나는 할머니의 연결이라니. 한 때 아이를 낳고 아이를 키웠고 지금은 유모차에 의지해서 걷는 할머니의 운명, 그리고 누구보다 여자를 잘 아는 할머니가 오히려 여고생에게는 손가락질과 비난을 하는 현실. 모든 생명이 축복 속에 태어나고 그렇게 생명을 키운 여성들이 축복받으며 살아가는 시대를 염원하며 두고두고 음미해보아야 할 것 같다.

 

< 구더기 >

 그녀는 자신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

혼신의 힘으로 부엌 쪽 창문을 향해

기어갔다

 

사람들은 얼마 전부터

그녀의 집 창문을 통해 자꾸만

1층 주차장으로 구더기가

떨어진다고 했다

 

시 속에 얼마나 많은 아픈 이야기와 긴 시간이 흘렀는지, 한 편의 소설이 나옴직한 글이다. 우리가 더럽다 여기는 구더기가 그녀의 또 다른 몸일 수 있고, 그녀의 아픔을 전하는 전령일 수도 있다. 그녀의 이야기를 전하러 주차장으로 떨어지는 구더기의 몸부림에서 그녀가 우리에게 하고 싶은 아우성을 듣는다. 

< 백숙 >

마당가엔 라일락이 피고 뒷산에선 뻐꾸기가 울었다

볕이 좋아 아내는 이불 빨래를 널었다

병든 아버지를 위해 나는 수돗가에서 닭을 잡았다

더 마르기 전에 모습을 남겨두어야 한다며

아버지는 대문간 옆에 양복 상의만 갖춰 입고 마당으로 걸어나왔다

맨발에 슬리퍼를 신은 아버지는 웃고

백숙은 솥에서 저 혼자 끓고

-하지만 백숙은 살이 녹을 때까지 더 오래 끓이는 것

나는 아버지의 얼굴 속에 5월의 라일락과 뻐꾸기 소리,

우아하게 지붕 위로 날아오르는 구름을 담고자 찰칵찰칵 셔터를 눌렀다

그리고 모여 백숙을 먹었다

 

오월 볕 좋은 날, 병든 아버지를 위해 백숙을 끓이고 아버지의 영정 사진을 찍는 모습이 그려진다. 아버지는 웃으시지만 이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아실 테고, 그래서 자식은 그것이 눈물겨워 일없이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다. 살이 녹을 때까지 오래 끓인 백숙을 모여 먹는 식구들, 부모의 피와 살로 자란 자식들과 온몸으로 시대를 살아온 아버지의 모습이 보인다. 식구들에게 세끼를 먹이려고 고된 노동과 애태움으로 살았지만 남는 건 고작 사진 한 장 뿐일까? 사진 속에는 라일락 향기와 뻐꾸기 소리, 구름이 피어나던 좋은 날의 정경도 같이 들어있다.

 

< 출산 >

 

화구(火口)가 열리고

 

어머니가 나왔다

 

분쇄사의 손을 거친 어머니는

 

작은 오동나무 함에 담겨 있었다

 

함은 뜨거웠다

 

어머니를 받아 안았다

 

갓 태어난 어머니가

 

목 없이 잔뜩 으깨진 채

 

내 품안에서

 

응애, 첫울음을 터뜨렸다

 

 

고영민 시인의 시를 더 많이 옮겨 적고 싶지만 문학동네의 시인선 073 고영민 시집 구구를 읽어 더 많은 시인의 시를 접하시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