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동안 잘한 일을 찾는다면 50살 넘어 백두대간을 종주한 일을 그중 하나로 꼽을 수 있겠다.
2012년부터 2년 가까이 월 2회씩 총 700여km의 백두대간 길을 걸었다.
직장 생활 30년을 넘을 즈음 내게 다가 온 힘든 고비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이 산행을 시작했다.
60년대 어린 시절, 대부분의 친구들은 산에서 나무를 모아 집안의 땔나무를 보급하느라 쉬는 날을 거의 보냈다.
틈만 나면 산에 가서 잔풀을 베고 낙엽을 긁어모아, 무거운 나뭇짐을 이고 지고 내려오는 노동을 했다.
우리 집은 잘 살지는 않았지만 선산이 있어서 나는 나무하러 다니지는 않았다.
그래선지 소풍을 갈 때도 산에 오르지 못해 친구들에게 끌리다시피 걸었다.
산을 오르는 것은 힘든 일이었고, 그렇지만 해보고 싶은 일이었다.
지리산 종주를 했다든지 하는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면, 언젠가 나도 해봐야지 하는 생각만 했지 그럴 기회가 없었다.
지금의 직을 계속 이어나가야 할지 그만두어야 할지 힘든 순간, 나는 산행을 하며 나를 돌아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산행을 해보기도 했지만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여러 곳을 찾다가 야간 산행 카페에 가입하였다.
내가 사는 곳에 가까우면서 평일 야간산행과 주말 산행도 하는 모임이었다.
카페에 기록된 산행 역사를 보니 마치 조선실록을 보는 듯했다.
야간 산행 날짜와 회차, 걸은 지도, 거리, 참가자, 사진 등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었다.
평일 야간 산행일에 정해진 대장이 산행을 이끌고, 그 대장이 산행 시간, 장소, 산행 코스 등 모든 것을 관리하는 형식이었다. 알고 싶은 모든 것이 한눈에 보였다.
몇 번을 망설이다가 여름방학 즈음 카페에 가입했다.
산행을 1번이라도 참석하면 회원이 되었다.
산행 공지 글에 참가 댓글을 달면 누구나 참석이 가능했다.
밤 8시경 공지된 장소에 모여 2시간 전후의 장산 산행을 하고, 이기대나 황령산, 문텐로드 등으로 코스는 바뀌기도 했다.
밤에 산행하다가 미끄러져 다치면?
그래서 출근을 못하는 상황이 생기면?
이런저런 이유로 미루다가 더 이상 핑곗거리가 없을 즈음,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지, 한번 해 보는 거야.’
가입한지 한 달 만에 용기를 내어 첫 야간 산행에 참석했다.
낮 산행도 힘든데 야간산행이라니, 모든 것이 낯설었다.
랜턴도 무얼 사야 할지 몰라서 빌렸다.
걷기가 힘들면 7시 40분쯤 와서 다른 회원보다 먼저 출발해도 된다는 대장님의 친절한 안내가 있었다.
온갖 생각에 함몰되어 있던 나를 육체적 극한에 내몰았을 때 나는 어떨지 보고 싶었다.
혼자 여름밤 축제에 참석하듯, 두려움 반 기대 반으로 몇 회원과 함께 출발했다.
초보자 위주의 740조(7시 40분 출발)는 조금 느리게 걷는 편인데도 나는 시작부터 숨쉬기가 곤란했다.
랜턴은 나를 환영하듯 내 앞길을 환하게 비추었다.
50년 묵은 찌꺼기와 땀에서 나오는 향기가 장산의 온갖 벌레를 유혹했는지 내 눈앞에서 어지럽게 춤을 추었다.
산을 오르며 내딛는 걸음이 얼마나 무거운지,
그리고 땀인지 눈물인지 왜 이리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지.
밤이라서 너무나 다행이다.
낮이라면 내 몰골이 어떠할지, 누군가 나를 알아볼까하여 그냥 도망쳤을 텐데……
이처럼 무거운 걸음을 언제 느껴보았더라?
어릴 적 볏단을 머리에 이고 추수하는 논으로 수없이 오가며 옮길 때보다 지금의 무게가 더 할까?
출렁이는 볏단의 무게를 견디던 어린 내가 아니고, 지금은 내가 선택한 무게이니 걸어보자.
한 걸음씩 걷다보면 언젠가 정상에 도달한다.
산이 높다니 힘들다니 하고 오르지 않았을 뿐, 한 걸음씩 오르면 언젠가 도달한다.
기다리며 격려해준 대장님과 회원들에게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으로 나를 옮겨보았다.
오직 나만 나를 움직일 수 있다.
누구도 내 걸음을 대신해 줄 수 없다.
그것이 고통일 수 있지만 또한 축복이고 감사한 일이다.
초등학교만 다닐 뻔했던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지금의 자리에서 이런 고민을 한다는 것이 한편으론 감사한 일이다.
모두가 잠들 준비를 하는 이 시각에 나는 여기서 나를 단련할 수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누군가 밤에 산을 오르라고 시켰으면 고발이라도 하겠지만,
내가 선택했고, 그래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이 발걸음의 무게는 내 노력에 따라 점점 가벼워질 것이다.
계속 휘청거리며 살 것인가, 아니면 두 다리로 굳게 서서 대지를 박차고 앞으로 나아갈 것인가?
한 걸음씩 나아가니 드디어 정상에 도착했다.
나를 옥죄던 가쁜 숨은 어느새 기쁜 탄성으로 바뀌었다.
장산에서 내려다보는 광안대교와 해운대의 불빛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내가 그 곳에 있다는 것이 너무나 감사한 순간이었다.
낮에 오르는 산과는 다른 쾌감이 나를 감쌌다.
모두가 잠든 순간 나 홀로 열심히 공부할 때 느끼는 기쁨과 닮은 듯하면서 짜릿했다.
지금 이 순간의 느낌이 오래 남도록 마음에 새겼다.
50 넘는 인생길에서 이처럼 황홀한 순간을 몇 번이나 느꼈을까?
내가 쏟은 땀과 이후의 기쁨은 비례하나 보다.
8시조 회원들이 도착한 후 함께 사진을 찍었다.
나는 첫 참석이라 개인적으로 사진을 또 찍어주었다.
가볍게 물도 마시고 숨을 고른 후 내려갈 때는 같이 출발하였다.
내려가는 발걸음은 너무나 가벼웠다.
내려갈 때의 나는 1시간 전의 내가 아니었다.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며 쉬지 않고 내려가니 어느새 산행 출발 지점에 도착했다.
밤에 장산을 올라 정상에 도착하고 다시 여기까지 온전히 내려온 것이다.
헤어질 때 여러 회원들이 한 마디씩 해주었다.
처음엔 힘들어도 계속하다 보면 점점 나아진다, 어쨌건 붙어있기만 하면 언젠가 달라진 걸 느끼게 될 것이라는 말도 해주었다.
가슴 벅찬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가면서 자주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직장생활하면서 운동하러, 그것도 밤에 산행을 하기란 쉽지 않았다.
온 몸이 쑤셔서 며칠을 끙끙 앓고 갈까 말까 망설였다.
그래, 붙어있기만 하자.
나를 실험대상으로 하여 어떻게 달라지는지 보자는데 생각이 미쳤다.
2주일이 지난 후 2번째 산행에 참석했다.
이렇게 한두 번씩 산행에 참석하면서 힘들어하는 나를 비웃듯 가볍게 달리듯 걷는 회원들이 부러웠다. 도대체 얼마만큼 해야 저 수준에 도달하는 걸까?
문제의식 없이 걸으면서 계속 힘든 산행을 하기는 싫었다.
나를 어느 수준에 올려두어야 산행도 즐거운 일이 될 것이다.
산행 팀에서 살아남기 위해 허약한 나를 변화시켜 보자며 가입한 지 두 달 후부터 시작하는 백두대간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회원들의 불안한 눈빛도 부담스러웠지만 팀에 폐를 끼칠 것을 알기에 도전이 망설여졌다.
하지만 미안함을 무릅쓰고 도전했다.
그 미안함이 나를 채찍질하고 나를 단단하게 할 것이다.
그렇게 도전한 백두대간 산행은 힘들었다.
하루 종일 걸은 후 이제 끝인가 하면 다시 큰 산이 앞에 버티고 있을 때는 울고 싶은 마음이었다.
겨울 소백산에서 눈에 푹푹 빠지면서, 앞 사람의 발자국 위에 나도 발을 디뎌야만 앞으로 갈 수 있었다. 내가 무엇을 위해 이러고 있나 하고 나를 원망했다.
책 속에서의 비유로만 알았던 ‘살을 에는 추위’를 함백산에서 온몸으로 느껴보기도 했다.
그야말로 칼로 살점을 도려내는 듯한 추위였다.
어둔 새벽 동트는 해를 산에서 마주하기를 여러 번했다.
애국가 속의 한 장면인 설악 위에서 바라본 가슴 뛰는 정경,
구름위에 서서 지리산을 걸을 때는 시공간을 넘나드는 환상에 빠지기도 했다.
산행을 하면서 헝클어진 문제들도 해결하고 이제 정년퇴직을 했다.
산행을 하면서 참는 법을 배워가며, 누구나 품어주는 넉넉한 산을 닮아가고 싶다.
첫 야간산행 후 밤에 산을 오르는 건 뜸하지만 지금도 혼자 또는 여럿이 산행을 이어가고 있다.
산행뿐만 아니라 대중교통을 이용한 후 어디든 걸어 다니는 씩씩한 할머니가 되었다.
한비야처럼 걸어서 지구 세 바퀴는 어려울지라도 아름다운 우리나라 구석구석을 돌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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