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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정아 글쓰기

내가 필요할 때 나를 불러 줘

by 프리정아 2023. 11. 7.

 

내가 필요할 때 나를 불러 줘. 언제라도 달려갈게.

 낮에도 좋아 밤에도 좋아, 언제라도 달려갈게.

 

누구라도 흥얼거릴 만큼 잘 알려진 노래이다.

내가 필요할 때 부르면 달려올 누군가가 있다는 든든한 믿음은 삶을 푸근하게 한다.

가을걷이 후 곳간에 그득하게 곡식을 쌓아둔 농부처럼.

 

내 지난날은 내가 불러도 달려와 줄 누구도 없는 텅 빈 들 같았다.

지금이라도 곳간을 채워두지 않으면 안 되는 조급함과 뭘 해도 채워지지 않는 허기진 마음,

내가 똑바로 서서 집안을 돕고, 형제들을 이끌어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어릴 때 동네에서 같이 놀던 친구들이 어느 날 보이지 않았다.

궁금해서 물으니 그 아이들은 학교에 갔단다.

나도 학교에 보내달라고 몇 날이고 떼를 써서 학교에 갔더니 나도 학교에 다니란다.

입학통지서가 나오지 않았거나, 나온 걸 부모님이 몰랐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입학 연령보다 1살 작은 1월생인 내가 당시 학교에 가야 하는 걸 부모님이 몰랐을 확률이 높다.

입학식도 없이, 글자도 모르면서 학교에 가서 겪은 이야기들은 소설로 씀 직하지만 당시의 대부분 아이들이 글자를 모르고 갔으니 그리 대단한 이야기가 아닐 수 있다.

나의 공부를 도와주는 사람도 없었고, 나도 그 필요성을 굳이 느끼지 않으며 철없는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당시 두 살 터울 오빠가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중학교 둘을 보내기는 힘드니 나에게 중학교에 가지 말라는 것이었다. 60년대 당시에는 중학교에 안 가는 아이들이 제법 있었다.

나는 눈물을 머금고 중학교 진학을 포기해야 했다. 학교에서 공부하고 친구들과 놀면서 집을 벗어나는 것이 즐거웠기에 나의 슬픔은 컸다.

술과 도박, 폭력 등으로 가족을 책임지지 못하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도 컸다.

 

집에 있어도 할 일은 많았다.

우물이나 도랑까지 가족들 옷을 머리에 이고 가서 빨래하고, 농사일도 거들고, 동생들 돌보기까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이 일들은 초등학교 다니면서도 계속해오던 일이었다.

어머니는 나보다 더 바빴기에 나 스스로 일을 찾아서 하다 보니 부업인 새끼 꼬기, 가마니 짜기 등도 하였다.

 

친구언니가 진주에 돈 벌러 가자는 이야기를 듣고 어려운 집안을 돕자는 생각에 따라나섰다.

양과점이나 가게에 납품하는 아이스케키(빙과류)를 만드는 공장에서 포장하는 작업이었다. 여름 두세 달을 일했다.

아는 것이 없어서 당하는 멸시와 부당함, 권위에 대한 도전정신이 오늘날 나를 있게 한 자양분이었다.

그렇게 초등학교 졸업 후 돈 벌러 갔던 아이가 40여 년의 공직생활을 마감하고 퇴직을 한 나이가 되었다.

허허벌판에서 용감하게 싸운 장수가 이제 칼을 내려놓고 그 칼을 어디에 쓰면 좋을까 기웃거리는 모양새랄까?

내가 필요할 때 나를 불러주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살려고 한다.

튼튼한 두 다리로 우리나라, 지구 어디든. 아니 불러주지 않아도 내가 필요한 곳을 찾아가며 살려고 한다. 이제껏 내가 살았던 것처럼…….

 

바쁜 출근길에 승강기를 누르는 짧은 순간이 기쁘다.

내가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와서 나를 태워주니까.

뭘 까먹고 와서 다시 올라가도 눈살 찌푸리지 않고 나를 데려다준다.

내 편이 있다는 것,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해도 응석을 받아줄 무언가, 누군가가 있다는 건 얼마나 든든한 일인가?

누군가에게 그런 든든한 배경이 되어주고 싶다.

한편으론 응석을 부려보지 못하고 살아서인지 늘그막에 그런 응석도 부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