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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며/교육. 육아. 창의성

달라도 괜찮아 ('그래서 우리는 음악을 듣는다' 를 읽고)

by 프리정아 2024. 3. 9.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일어나지 말아야할 일이 내게 일어난 것이다. 아니, 앞으로 나에게 자주 일어날 수 있는 일의 예고편일 수 있다.

 

집 밖 활동을 늘릴 겸 주 1회 목요일에 시창작 공부를 신청하였다. 수요일은 '미술관 속 인문여행'을 신청해서 어제부터 시작하였다. 분명히 시 공부는 일주일 후인 것을 탁상달력에 기록했다. 미술관 여행에 너무 심취했는지 나는 목요일 아침부터 단장을 시작하였다. 시 공부가 있는 반송은 집에서는 좀 떨어져있지만 내가 3곳의 직장을 거쳐 8년이나 근무를 한 곳이었다. 그래서 푸근한 밥집도 있고 골목마다 얽힌 이야기도 많다. 틈 날 때마다 장산을 넘어 퇴근하며 익숙한 장산 등산로이기도 했다. 공부를 마치고 점심을 먹은 후 장산을 넘어 집으로 오려고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모자랑 장갑, 등산화까지 신고 버스에 올랐다. 출퇴근 할 때 자주 이용하던 36번을 타고 오랜만에 보는 석대꽃집 앞의 모종과 식물들도 보며 추억에 잠겨본다.

 

반송도서관 앞에 내리면서 뭔가가 내 머리를 쿵 친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준비하는 그 많은 시간 동안은 생각나지 않다가 버스에 내리는 순간 벼락같은 이 느낌은? 시 공부는 다음 주부터 시작되는 거였다! 오늘이 아니고.

 

나에게 이런 일이? 이것이 직장에 있는 동안 벌어졌다면 엄청난 일이었다. 다음 주 체험학습 가는데 나만 오늘 만반의 준비를 하고 나타난 격이다. 퇴직을 하고 혼자만의 실수이니 나만의 날갯짓으로 끝내면 된다. 하지만 내게 다가온 충격은 컸다. 벌써 치매인가?

 

순간의 충격으로 도서관을 바라보니 여러 프로그램들이 전면에 붙여져 나를 비웃듯 걸려있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갈까점심을 먹기는 이른 시간이고. 그렇다내 시간을 두 시간만 앞으로 당기면 된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천천히 걸어 산으로 진입했다. 돌탑을 지나 헬기장을 거쳐 자주 걷던 장산을 걸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오후 시간이 넉넉해져서 오히려 좋았다. 읽고 있던 '그래서 우리는 음악을 듣는다' 책을 펼쳤다. 이동진 작가의 1월 추천 책인데 인문학도서관에 신청하여 신간으로 받은 책이다. 지브르 음악 감독인 히사이시 조와 저명한 뇌과학자이자 일본의 행동하는 지성 요로 다케시의 대화를 엮은 책이다.

 

모든 대화가 나에게 의미있게 다가왔지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재미' 란 챕터가 오늘의 나의 이야기 같아서 웃으며 읽었다. 책 내용을 일부 인용해 본다.

 

요로: '이렇게 하면 저렇게 된다'하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도 재미가 없어요. 재미란 예상대로 전개되지 않는 데에 숨어 있으니까요. 과학의 세상에서 이론상으로 또는 실험해보면 이런 사실이 밝혀질 것이라든가 하는 것도 똑같은 방식이지요.

조직에 속한 사람은 그런 상식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 비교적 의문을 품지 않습니다. 어느 샌가 익숙해져 버려요. 아주 위험하지요. 극단적으로 말하면 그래서 인생이 재미없어지고, 그러다 우울증에 걸리고, 그러다 죽고 싶어지는 거예요. 

반대로 '이런 상황에서는 대체 어떻게 될까? 어디로 흘러가게 될까? 하고 생각해보면 지루하거나 우울하다고 느낄 틈이 없지요. 

 

히사이시: 그렇군요. 긴장감 덕분에 시각이 달라질 거예요.

 

요로: 저는 여행할 때도 목적을 설정하고 세세하게 일정을 짜서 움직이는 걸 아주 싫어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게 여행인걸요. 생각지 못한 곳에서 헤매게 된다 해도 그것 역시 좋은 경험이잖아요.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사회가 어느 정도 조직되면 그런 방식은 무책임하다는 말을 듣지요. 인간을 위해 사회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위해 인간이 존재하는 경지에 이르고 맙니다. 이렇게 하지 마라, 저렇게 하지마라. 법률만 만들어대고. 그렇게 하면 인간은 당연히 행복해지지 못하지요. (본문 229-231쪽)

 

그렇다. 내가 일주일 먼저 공부하러 갔다고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니고 퇴직 후 겪어서 오히려 다행인 경험을 한 것이다. 40 여년의 조직 생활 속에서 시간마다 짜인 생활을 하다 보니 계획에서 벗어난 오늘의 일이 나에겐 충격이었다. 나를 치매환자로 만들어 스스로 꼬리표를 달 뻔 했다. 늘 준비하던 물을 준비하지 않아서 산을 걸으며 겪은 목마름, 나로 인한 충격으로 더욱 다운되던 산길에서 지나가는 아저씨에게 얻어 마신 매실엑기스는 얼마나 힘이 나던지. 긴 인생 여행길에서 오늘 하루 나에게 일어난 일일 뿐이다. 어쩌면 전혀 계획되지 않은 새로운 일을 했더라면 더욱 재미있는 하루가 되었을 수도 있다.

어느 정도의 계획에 따르되 모르는 곳도 헤매보고 안하던 새로운 일도 도전하며 free한 정아로 살아야겠다. 재미란 예상대로 전개되지 않는 데에 숨어 있으니까. 앞으로 숱하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만 그 시공간에서 최상의 재미를 찾으며 살아가야겠다. 

 

책 속의 대화에 나도 빨려 들어갔다.  '사회에 가득찬 저주의 말'이라는 챕터도 좋았다.

 

요로: 요즘에는 축복하는 말이 점점 사라지고 저주의 말이 엄청나게 늘어난 느낌이 들어요. 우리가 어릴 때는 세상의 절반이 자연이었잖아요. 세계에서 인간과 접하는 부분이 절반, 자연과 접하는 부분이 절반이었지요. 인간 세상에서 선생님에게 혼나는 나쁜 일이 생겨도 삼촌이 공원에 데려가 준다는 좋은 일이 있었어요. 놀러 나가면 재미있는 것을 발견하기도 하고 똥구덩이에 빠지기도 하지요.ㅎㅎ. 즐거움과 좌절이 인간 세상에도 있고 자연에도 있는 것이 아이의 세계였습니다. 그런데 세계의 절반인 자연이 사라지면서 인간관계만이 세계의 전부가 됐습니다. 쉽게 말해 그 영향력도 두 배가 된다는 계산이지요. 

 

'열네 살의 내가 쓴 유서'라는 책의 저자는 스물다섯 살이 되어 중학생 때 따돌림을 당한 기억에 대해 썼습니다. 그 책에는 자연이 전혀 나오지 않아요. 벚꽃이 피거나, 태풍이 오거나, 눈이 왔다는 이야기가 하나도 없지요. 선생님이, 친구가, 부모가 뭐라고 말했다. 친구의 태도가 어땠다. 전부 인간의 세계예요.  

인간 사회 속에만 있으면 의식이 왜곡된 형태로 비대해지지요. 그래서 저주의 말도 크고 심각한 문제가 되고 맙니다. 

돌이켜보면 누군가에게 야단을 맞거나 괴롭힘을 당했을 때, 자연에 들어가 걸어다니면 완전히 잊어버릴 수 있었어요. 다시 말해 자연이 해독제였던 거지요. 나무에 오르다가 떨어진다 해도, 그건 상처를 주는 사건은 아니에요. 터놓고 말하면 자연은 인간 사회의 자잘한 일과는 관계가 없는 세계입니다. 그래서 자연과 접하면 균형이 맞지요. 

 

히사이시: 요즘은 어디에 올라가다 떨어지면 위험하니까 안 된다 등의 말이 너무 많아요.

 

요로: 어쩌다 다치기라도 하면 야단법석을 떨면서 관리자가 누구냐, 관리 부주의가 아니냐는 이야기로 흐르니 답이 없어요. 가끔은 인간이 지배하는 사회를 벗어나 중립적인 자연의 세계로 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 173-177쪽)

 

자연을 삶에서 몇 % 정도를 두는지에 따라서 사람은 달라진다고 한다.

나의 외손녀는 길 가다가 떨어진 나뭇잎, 열매, 돌 등을 예쁘다며 주워서 나에게 준다. 어린이집에서 노는 사진을 보아도 바깥 놀이할 때 나뭇잎을 주워서 친구들에게 주는 것을 본다. 어느 날 손녀에게 물어보았다.

   "친구에게 나뭇잎을 주면 친구들은 좋아하니?"

   "아니야. 나는 선물로 주었는데 친구는 그냥 버려."

화단에 떨어진 나뭇잎도 사랑하고, 그것을 친구와 할머니에게 주는 손녀가 사람과 자연 사이에 균형을 이루며 잘 자라길 빌어본다. 지금은 자연이 거의 전부를 차지하여서인지 손녀는 잠자기도 싫어할 만큼 하루가 즐거워보인다. 동생과 엄마의 사랑을 나눠야하는 안타까움이 있지만 ''내가 좀 더 참아볼게요." 라며 나를 놀라게 하기도 한다. 자연과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손녀를 통해 배우고 있다.

 

요즘은 모두가 위태로워보인다. 학생이나 직장인, 수많은 문제들을 자연을 돌아보며 해결하였으면 좋겠다. 계절마다 달라지는 산들과 가로수, 날마다 달라지는 바다와 하늘의 빛깔. 부지런히 걷지 않아도 그냥 자연 속에서 시간을 보내기만 해도 문제가 눈 녹듯 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산을 넘어 집에 도착할 즈음, 내 머리를 때렸던 충격은 사라지고 도로변 천리향 사진을 찍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사람은 변하는 존재라는 전제를 세우면 지금 이 시간을 아주 소중하게 여길 수 있을 거예요. 내일의 나는 오늘과 다를 겁니다. 달라도 괜찮고요. (히사이시 조) '

 

나와 다른 사람의 변화를 기쁘게 바라보며 날마다 생동감 있게 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