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안도현 詩作法)
안도현 시인이 쓴 시작법(詩作法) 안내서라 할 수 있는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는 책을 오래전에 읽었다. 시를 쓰고 읽는 법을 자상하게 가르쳐 주는 책이라서 오래전 필사하며 시를 이해하려 애쓴 적이 있다. 안도현 시인의 책의 일부를 옮겨 적으면서 시에 대해 이해하고 적어도 써보려는 마음을 가진 이에게 도움이 되려나 하고 일부만 정리해서 옮겨본다.
Ⅰ. 한 줄을 쓰기 전에 백 줄을 읽어라
좋은 글을 쓰려면-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상량(多商量)
좋은 시를 쓰려면
-술을 많이 마셔라. 술이란 타인과의 소통을 위한 매개이지 주정을 부리기 위한 약물이 아니다. 술을 마시면서 지루한 일상 너머를 꿈꾸는 행운을 얻을 수도 있다. 함께 마시는 사람의 눈을 찬찬히 들여다 볼 수도 있다. 시인은 일상이라는 유리그릇을 박살내는 자가 아니다. 유리그릇에 다만 빗금을 긋는 자임을 명심하고 마셔라, 한 편의 시를 쓰려거든 백 잔의 술을 마신 다음에 쓰라.
- 연애를 많이 하라. 무릇 모든 연애는 나 아닌 것들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다. 연애시절에는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 하나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고, 연애의 상대와 자신과의 관계를 통해 수없이 많은 관계의 그물들이 복잡하게 뒤얽힌다는 것을 생각하고, 훌륭한 연애의 방식을 찾기 위해 모든 관찰력과 상상력을 동원하기 마련이다. 담쟁이넝쿨은 담을 어루만지며, 담에 매달리며, 담하고 연애하면서 담을 타고 오른다.
- 시 한 줄을 쓰기 전에 백 줄을 읽어라. 많이 쓰기 전에, 많이 생각하기 전에, 제발 많이 읽어라. 시집을 백 권 읽은 사람, 열 권 읽은 사람, 단 한 권도 읽지 않은 사람 중에 시를 가장 잘 쓸 사람은 누구이겠는가? 초보자가 쓴 시의 성패는 분명히 독서량에 비례한다. 좋은 시를 접하지 않고서는 좋은 시를 선별할 수 없으며, 좋은 시를 쓸 수도 없다.
* 최한기-문장은 하루아침에 쌓을 수 있는 잔재주가 아니라 오랜 세월 노력이 쌓여야 한다.
* 김정희-글씨를 잘 쓰려면 오천 권의 문자가 가슴에 있어야 한다.
* 다산이 문장 공부하러 온 변지의에게 이른 말…….사람이 글을 쓰는 것은 나무에 꽃이 피는 것과 같다. 나무를 심는 사람은 가장 먼저 뿌리를 북돋우고 줄기를 바로잡는 일에 힘써야 한다. 그러고 나서 진액이 오르고 가지와 잎이 돋아나면 꽃을 피울 수 있게 된다. 나무를 애써 가꾸지 않고서 갑작스레 꽃을 얻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나무의 뿌리를 북돋아주듯 진실한 마음으로 온갖 정성을 쏟고, 줄기를 바로잡듯 부지런히 실천하며 수양하고, 진액이 오르듯 독서에 힘쓰고, 가지와 잎이 돋아나듯 널리 보고 들으며 두루 돌아다녀야 한다.. 그렇게 해서 깨달은 것을 헤아려 표현하다면 그것이 바로 좋은 글이요, 사람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는 훌륭한 문장이 된다. 이것이야말로 참다운 문장이라고 할 수 있다. 문장은 성급하게 마음먹는다고 해서 갑자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나는 시 창작 강의 첫 시간에 반드시 읽어야 할 시집 목록을 프린트해서 학생들에게 나눠준다.
시를 쓰는 사람에게는 시집이 악기다. 시집은 악기처럼 비싸지 않고, 무겁지 않고, 고장이 나지도 않는다. 시집을 읽다가 마음에 쏙 드는 시를 만나면 노트에 적어둔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도 필사를 권한다. 아니, 거의 강요한다. 한 학기를 마칠 때쯤이면 수백 편의 시가 적힌 자기만의 시집이 오롯이 남으니, 꿩 먹고 알 먹는 격이다.
다양한 시를 읽는 것은 다양한 음식을 맛보는 것과 같다. 음식을 먹는 행위는 훌륭한 관찰의 소재가 되고, 그 기억은 또한 멋진 시의 재료가 되는 것이다. 맛있는 시를 많이 음미해 본 사람이 맛있는 시를 쓸 수 있는 이치와 같다.
-기형도, 엄마 걱정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시를 쓰는 일은 세상을 두루 공부하는 일이다. 습작은 단순히 글을 잘 쓰는 연습에 그치는 게 아니라 세상을 부단히 배우고 익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린 새가 둥지 바깥으로 날아오르기 위해 부단한 노력이 필요한 것처럼 습작도 노력을 거듭해야 하는 고통스런 작업이다. 마음에 드는 한 편의 시를 썼을 때 땅을 박차고 솟구치는 자아의 충만감을 느낄 수도 있다. 아, 당신도 시를 쓰라.
Ⅱ. 재능을 믿지 말고 자신의 열정을 믿어라
1. 타고난 시인은 없다.
천재 시인이 있을까?
내가 보기에 천부적으로 문학적 재능을 타고난 시인이란 애초부터 없다.
시를 쓰고자 하는 사람이 자신의 문학적 재능에 대해 회의하거나 한탄할 필요는 전혀 없다. 그것은 자신의 게으름을 인정한다는 것과 같다.
2. 몰입의 기술
아무리 짧은 시 한 편을 쓰더라도 단편소설 한 편을 쓰는 것에 버금가는 시간을 투자하고, 자료를 취재하고, 공력을 집중시켜라. 부디 열정을 품고 감성을 연습하고 훈련하라. 시는 온전하게 몰입할 때 온다.
안도현, 개화
생명이 요동치는 계절이면
넌
하나씩 육신의 향기를 벗는다.
온갖 색깔을
고이 펼쳐둔 뒤란으로
물빛 숨소리 한 자락 떨어져 내릴 때
물관부에서 차오르는 긴 몸살의 숨결
저리도 견딜 수 없이 안타까운 떨림이여
허덕이는 목숨의 한 끝에서
이웃의 웃음을 불러일으켜
줄지어 우리의 사랑이 흐르는
오선의 개울
그곳을 건너는 화음을 뿜으며
꽃잎 빗장이 하나둘
풀리는 소리들
햇볕은 일제히
꽃술을 밝게 흔들고.
별무늬같이 어지러운 꽃이여.
꽃대궁 앓는 목숨의 꽃이여.
이웃들의 더운 영혼 위에
목청을 가꾸어
내일을 노래하는 맘을 가지렴.
내일을 노래하는 맘을 가지렴.
Ⅲ. 시마(詩魔)와 동숙할 준비를 하라
시마-한 가지 일에 열중하여 그 본성을 잃는 것
시인이란, 우주가 불러주는 노래를 받아쓰는 사람이다. 언제, 어디서든 메모지와 펜을 챙기고 받아쓸 준비를 하라. 잠들기 55분 전쯤 기발한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갈 때, ‘내일 아침에 꼭 그것을 써야지’ 하고 생각만 하고 잠들어버리지 말라. 영감은 받아 적어 두지 않으면 아침까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똥 하고 친해져야 한다.
똥이라는 말은 얼마나 향기로운가, 똥이 삶의 실체적 진실이라면 대변은 가식의 언어일 뿐이다. 시는 대변을 똥이라고 말하는 양식이다.
안도현 시인이 지리산 실상사 근처에서 한 보름 지내며 똥과 관련된 이야기가 재미있다. 시인이 묵은 곳은 산 중턱의 외딴집이었다. 밤늦게 글을 쓰다 화장실까지 한참을 걸어 내려가야 하는 게 귀찮아서 매일 뒷산에서 ‘큰일’을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절밥을 먹었으니 땅에게 똥을 돌려주는 일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삽 한 자루와 휴지만 달랑 들고 숲 속으로 가면 곳곳에 내 똥을 받아줄 자연이 기다리고 있었다.
-안도현 시, 사라진 똥
뒷산에 들어가 삽으로 구덩이를 팠다 한 뼘이다
쭈그리고 앉아 한 뼘 안에 똥을 누고 비밀의 문을 마개로 잠그듯 흙 한 삽을 덮었다 말 많이 하는 것보다 입 다물고 사는 게 좋겠다
그리하여 감쪽같이 똥은 사라졌다 나는 휘파람을 불며 산을 내려왔다
-똥은 무엇하고 지내나?
하루 내내 똥이 궁금해
생각을 한 뼘 늘였다가 줄였다가 나는 사라진 똥이 궁금해 생각의 구덩이를 한 뼘 팠다가 덮었다가 했다.
시인이란, 우주가 불러주는 노래를 받아쓰는 사람이다. 언제, 어디서든 메모지와 펜을 챙기고 받아쓸 준비를 하라. 잠들기 55분 전쯤 기발한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갈 때, ‘내일 아침에 꼭 그것을 써야지’ 하고 생각만 하고 잠들어버리지 말라. 영감은 받아 적어 두지 않으면 아침까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래서 잠자리에 들기 전에 나는 아예 메모지와 펜을 머리맡에 두고 잔다. 화장실에도 속주머니에도 넣어둔다.
Ⅳ. 익숙하고 편한 것들과는 결별하라
상투성은 시의 가장 큰 적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소재라고 하더라도 시인의 미적 인식에 의해 재발견되지 않으면 그것은 시라고 할 수가 없으며 죽은 인식의 되풀이에 불과하다. 죽은 인식은 죽은 언어를 불러온다. 시인의 가장 큰 임무 중의 하나는 죽은 언어를 구별하여 과감히 버리고 살아 있는 언어와 사투를 벌이는 일이다.
상투성의 그물 예
-가을
낙엽- 떨어진다
코스모스- 한들한들
귀뚜라미- 귀뚤귀뚤
단풍잎- 빨갛게
하늘- 푸른 물감을 뿌리다. 등
-안도현, 너에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2. 세계와의 불화
보들레르-미(美)는 언제나 엉뚱하다.
당신이 다다르고자 하는 미적 인식을 위해 낯설게 하기라는 개념을 창작의 신조로 삼으라.
늘 보고 있으면서도 사실은 보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보라.
소소한 것에서부터 삶의 기미를 포착하고 파악하는 습관을 길러라.
사물을 반듯하게 보지 말고 거꾸로 보라.
세상을 걸어 다니면서 보지 말고 때로는 물구나무를 서서 바라보라.
지금부터는 진실이라고 믿고 있던 것들을 의심하고, 아름답다고 여기던 것들과 끊임없이 싸우고, 익숙하고 편한 것들과는 결별을 선언하라.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한 순간도 미적 인식에 다다를 수 없게 된다.
Ⅴ. ‘무엇’을 쓰려고 하지 말라
정작 중요한 것은 어떤 소재를 택해 쓰느냐는 게 아니다.
그 어떤 소재를 어떤 눈으로 바라보았느나는 것이다. 모든 시인은 경험한 것에 대하여 쓴다. 하지만 경험한 것을 곧이곧대로 쓰지는 않는다. ‘무엇’을 쓰려고 집착하지 말라. ‘무엇’을 쓰려고 시간을 끙끙댈 게 아니라 단 10분이라도 ‘어떻게’ 풍경과 사물을 바라볼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본 것, 가까운 것, 작은 것, 하찮은 것
일상생활 속에서 소재를 찾고, 예쁘게 꾸미려는 마음을 없애야 좋은 글이 나온다.
1) 단 한 번이라도 자신의 눈으로 본 것을 써라.
-김용택, 그 여자네 집
그 여자네 집
가을이면 은행나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집
해가 저무는 날 먼데서도 내 눈에 가장 먼저 뜨이는 집
생각하면 그리웁고
바라보면 정다웠던 집
어디 갔다가 늦게 들어가는 밤이면
불빛이, 따뜻한 불빛이 검은 산속에 깜빡깜빡 살아 있는 집
그 불빛 아래 앉아 수를 놓으며 앉아 있을
그 여자의 까만 머릿결과 어깨를 생각만 해도
손길이 따뜻해져오는 집
살구꽃이 피는 집
봄이 오면 살구꽃이 하얗게 피었다가
꽃잎이 하얗게 담 너머까지 날리는 집
살구꽃 떨어지는 살구나무 아래로
물을 길어오는 그 여자 물동이 속에
꽃잎이 떨어지면 꽃잎이 일으킨 물결처럼 가닿고 싶은 집
샛노란 은행잎이 지고 나면
그 여자
아버지와 그 여자
큰오빠가
지붕에 올라가
하루 종일 노랗게 지붕을 이는 집
노란 초가집
어쩌다가 열린 대문 사이로 그 여자네 집 마당이 보이고
그 여자가 마당을 왔다갔다하며
무슨 일이 있는지 무슨 말인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소리와
옷자락이 대문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면
그 마당에 들어가서 나도 그 일에 참견하고 싶었던 집
마당에 햇살 노란 집
저녁 연기가 곧게 올라가는 집
뒤안에 감이 붉게 익는 집
참새떼가 지저귀는 집
보리타작, 콩타작 도리깨가 지붕위로 보이는 집
눈오는 집
아침 눈이 하얗게 처마끝을 지나
마당에 내리고
그 여자가 몸을 옹숭거리고
아직 쓸지 않은 마당을 지나
뒤안으로 김치를 내러 가다가 "하따, 눈이 참말로 이쁘게도 온다이이"하며
눈이 가득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싱그러운 이마와 검은 속눈썹에 걸린 눈을 털며
김칫독을 열 때
하연 눈송이들이 어두운 김칫독 안으로
하얗게 하얗게 내리는 집
김칫독에 엎드린 그 여자의 등에
하얀 눈송이들이 하얗게 하얗게 내리는 집
내가 함박눈이 되어 내리고 싶은 집
밤을 새워, 몇밤을 새워 눈이 내리고
아무도 오가는 이 없는 늦은 밤
그 여자의 방에서만 따뜻한 불빛이 새어나오면
발자국을 숨기며 그 여자네 집 마당을 지나 그 여자의 방 앞
뜰방에 서서 그 여자의 눈맞은 신을 보며
머리에, 어깨에 눈을 털고
가만가만 내리는 눈송이들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가만 가만히 그 여자를 부르고 싶은 집
그
여
자
네 집
어느 날인가
그 어느 날인가 못밥을 머리에 이고 가다가 나와 딱 마주쳤을 때
"어머나" 깜짝 놀라며 뚝 멈추어 서서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며 반가움을 하나도 감추지 않고
환하게, 들판에 고봉으로 담아놓은 쌀밥같이,
화아안하게 하얀 이를 다 드러내며 웃던 그
여자 함박꽃 같던 그
여자
그 여자가 꽃 같은 열아홉살까지 살던 집
우리 동네 바로 윗동네 가운데 고살샅 첫집
내가 밖에서 집으로 갈 때
차에서 내리면 제일 먼저 눈길이 가는 집
그 집 앞을 다 지나도록 그 여자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저절로 발걸음이 느려지는 그 여자네 집
지금은 아,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집
내 마음속에 지어진 집
눈감으면 살구꽃이 바람에 하얗게 날리는 집
눈 내리고, 아, 눈이, 살구나무 실가지 사이로
목화송이 같은 눈이 사흘이나
내리던 집
그 여자네 집
언제나 그 어느 때나 내 마음이 먼저
가
있던 집
그
여자네
집
생각하면, 생각하면 생.각.을.하.면……
2) 먼 곳이 아니라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을 써라.
3) 큰 것이 아니라 작은 것을 써라.
4) 화려한 것이 아니라 하찮은 것을 써라.
-손택수, 아버지의 등을 밀며
어머니를 따라갈 수 없으리만치 커버린 뒤론
함께 와서 서로 등을 밀어주는 부자들을
은근히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하였다.
그때마다 혼자서 원망했고, 좀더 철이 들어서는
돈이 무서워서 목욕탕도 가지 않는 걸 거라고
아무렇게나 함부로 비난했던 아버지
등짝에 살이 시커멓게 죽은 지게자국을 본 건
당신이 쓰러지 난 뒤의 일이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까지 실려 온 뒤의 일이다
그렇게 밀어드리고 싶었지만, 부끄러워서 차마
자식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던 등
해 지면 달 지고, 달 지면 해를 지고 걸어온 길 끝
적막하디 적막한 등짝에 낙인처럼 찍혀
지워지지 않는 지게자국
아버지는 병원 욕실에 업혀 들어와서야 비로소
자식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신 것이었다.
Ⅵ. 지독히 짝사랑하는 시인을 구하라
1. 필사의 즐거움
나는 백석의 시를 만날 때마다 노트에 한 편 두 편 옮겨 적기 시작했다. 그럴 때면 묘한 흥분과 감격에 휩싸여 손끝이 떨리고 이마는 뜨거워졌다. 나는 그야말로 필사적으로 필사했다. 그가 내게 왔을 때, 나는 그의 시를 필사하면서 그를 붙잡았다. 그건 짝사랑이었지만 행복했다. 나는 그의 숨소리를 들었고, 옷깃을 만졌으며. 맹세했고, 또 질투했다. 사랑하면 상대를 닮고 싶어지는 법이다.
필사는 참 좋은 자기 학습법이다.
백석의 시, 흰 바람벽이 있어 일부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안도현 시, 사랑
여름이 뜨거워서 매미가
우는 것이 아니라 매미가 울어서
여름이 뜨거운 것이다.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일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2. 사랑하면 길이 보인다.
-백석, 산숙
여인숙이라도 국수집이다.
메밀가루포대가 그득하니 쌓인 웃간은 들믄들믄 더웁기도 하다
나는 낡은 국수분틀과 그즈런히 누어서
구석에 데굴데굴하는 목침들을 베여보며
이 산골에 들어와서 이 목침들에 새까마니 때를 올리고 간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 사람들의 얼굴과 생업과 마음들을 생각해본다.
조금만 쓴다는 것이 안도현 시인의 비책을 너무 많이 드러내었다. 총 26장에 달하는 시작법과 옮겨온 주옥같은 시들이 살아서 내게 달려오는 것 같은 책이었다. ‘제발 삼겹살 좀 뒤집어라, 부처와 예수와 부모와 아내를 죽여라’ 등 재미있고 섬뜩한 제목들이 어서 읽어보고 싶게 만드는 책이었다. 시와 친해지고 싶은 사람에게 꼭 권하고 싶은 책이고 몇 번이고 읽어도 지겹지 않은 책이었다. 똥과도 친해지고 땟국물 낀 목침도 베어보며 사람 냄새나는 시를 써 볼 수 있도록 원서를 꼭 읽어보기를 권한다.